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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元 使行을 통해 본 李承休의 현실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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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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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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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318(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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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休가 활동했던 때는 무신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王政이 복고되는 격변의 시기이다. 아울러 동아시아에서는 기존의 다원체제가 종결되고 몽골 중심의 일원적인 지배가 구축되던 때이기도 하다. 林衍으로부터 폐위를 당한 적이 있던 元宗은 복위 후에 왕권을 확고히 하고자, 쿠빌라이 카안에게 통혼을 요청했다. 그러나 폐쇄적인 황금씨족의 혼례 특성상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기에 쿠빌라이 카안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결국 쿠빌라이 카안은 혼인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고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반면, 양국통혼을 통해 고려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원종은 혼인 성사를 위해 계속해서 쿠빌라이 카안을 압박하였고 이승휴 일행의 1273년 大元 使行은 이러한 민감한 정치 변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대원 사행은 표면적으로 황후 차부이와 황태자 진김의 冊寶禮에 참가한다는 명분이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정세를 파악해 가능한 한 빨리 쿠빌라이 카안에게 혼인을 실행에 옮기게 하는 일이었다.
1273년 대원 사행에서 원종은 고심 끝에 이승휴를 書狀官에 임명했다. 이승휴가 서장관에 발탁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실익 없는 對蒙항쟁 보다는 대원 중심의 세계 질서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고려의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양국 통혼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고자했던 원종의 정치적 견해와 일치한다. 여기에 원종은 이승휴가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문장력을 소유한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을 실행 시켜 줄 적합한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승휴는 대원 사행을 통해 직접 大元의 문물을 접하고 그 실체를 확인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대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강화했다. 기존의 고려 지식인들 사이에 회자되던 華夷觀에 입각한 부정적인 몽골 인식은 이승휴의 대원사행을 계기로 화이가 순종하는 정통이라는 인식으로 변모하였다. 이것은 몽골에 항복한 국가의 위기의식이 내재된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대원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정하고 고려가 혼인 관계를 통해 대원의 상층 질서 안에 편입해야만 고려의 社稷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현실적 이해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한편, 이승휴가 대원사행을 다녀와서 쓴 賓王錄은 한국사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使行錄이다. 賓王錄은 이승휴가 직접 경험한 사행 여정의 어려움은 물론이고 고려 지식인의 시각에서 대원의 정세와 大都의 사정을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Lee Seung-hyu worked in the end of military regime and recovery of imperial rule. In East Asia, plural systems were terminated to let Mongolia only govern the region. King Wonjong(元宗) who once lost crown by Lim Yeon asked Khubilai Khan to get married in order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However, the marriage was very much exceptional from point of view of Altan urug(黃金氏族) wedding so that Khubilai Khan was difficult to accept the request. At last, Khubilai Khan permitted the marriage and did not put it into practice and watched progress. On the other hand, King Wonjong who attempted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by the marriage between both countries pressed Khubilai Khan continuously to get married, and sent Lee Seung-hyu envoy to Yuan Empire at rapid political change in 1273. King Wonjong sent the envoy to join appointment of empress and prince superficially, and he actually made the envoy inspect political situation to let Khubilai Khan put marriage into practice as soon as possible.
In 1273, King Wonjong appointed Seojanggwan(書狀官), Lee Seung-hyu(李承休), upon mature consideration. Lee Seung-hyu was nominated to be Seojanggwan because he gave up useless fighting against Mongolia and instead admitted of Yuan oriented world order to reestablish status of Koryo Kingdom. Lee"s idea coincided with political opinion of King Wonjong who made effort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by marriage between both countries. King Wonjong admitted that Lee Seung-hyu had upright and honest nature as well as excellent writing skill enough to put king"s purpose into practice.
Lee Seung-hyu experienced culture of Yuan at marching of the envoy by himself to cognize Yuan in affirmative way. At that time, intellectuals of Koryo Kingdom cognized Mongolia in negative way based on Hwaeegwan(華夷觀) to make change of Hwaee(華夷) by taking opportunity of Lee"s marching of the envoy. The intellectuals cognized consciousness of national crisis that the kingdom surrendered to Yuan Empire: First of all, the intellectuals admitted of international order based on Yuan and thought that Koryo kingdom should be incorporated into Yuan"s order by marriage relation to preserve base of the dynasty that was based on practical interests. And, Lee wrote down "Binwangrok(賓王錄)" after marching of the envoy that was the longest record of marching of the envoy in the Korean history, and that was valuable to have difficulties at marching of the envoy and to investigate situation of capital city of Yuan from point of view of intellectuals of the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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