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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델라 만니피첸차(Della Magnificenza) : 고대 로마건축기술에 대한 열망과 환상 그리고 공포 = Della Magnificenza of Giovanni Battista Piranesi: Passion, Phantasy and Fear to the Architectural Technology of the Ancient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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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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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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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C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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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385-41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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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 로마의 신고전주의를 선행했던 역사적 사건은 고대 그리스-로마간의 우월논쟁이었다. 빈켈만이나 르루아 등이 중심이 되어 고대 그리스는 미술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이상으로 설정되었으며, 이와는 반대로 고대 로마미술은 그리스의 퇴행적인 모방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에 가장 극렬히 저항했던 예술가는 조바니 바티스타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 1720-1778)였다.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는 18세기에 가장 뛰어난 판화가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는 스스로를 항상 건축가로서 지칭하였다. 그의 가계에서부터 이어받은 소질과 열망은 건축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제작한 거의 모든 판화는 건축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두 개의 대표적인 판화집을 출간하면서 우월논쟁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안티키타 로마네 Antichit? Romane』(1756)와 『델라 만니피첸차 Della Magnificenza』(1761)를 출판한 시기는 신고전주의자들에 의해 그리스의 모범을 따르는 새로운 경향이 점차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이탈리아에서도 수많은 학자들이 고대 로마미술의 고유성과 자율적인 위치를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며, 피라네시는 스스로 그를 지원하는 학자들의 대변인이 되어 우월논쟁에 나갔다. 『안티키타 로마네』는 고대 그리스-로마간의 우월논쟁의 포문을 열었고, 『델라 만니피첸차』는 신고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피라네시의 최종 반론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피라네시는 고고학적 경험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이탈리아 계몽주의적인 학계로부터 역사와 건축에 대한 것을 배웠으며, 이것들을 자신의 주관적인 상상력 속에서 거대한 이슈로 키워나갔다. 그는 외삼촌인 루케시로부터 건축기술에 대한 경험을 얻었으며, 당대의 석학들인 폴레니로부터는 고대 로마건축의 과학적인 성과를 배웠고, 베네치아의 신고전주의 건축이론의 창시자 로돌리로부터는 건축의 현상학적 순수주의를 전수받았다. 그로 인한 첫 결과물인 『안티키타 로마네』에서 피라네시는 고대 로마건축의 우수성을 다양하고 견고한 축조방식과 거대한 토목공학적인 업적에 대해서 선전하였다. 피라네시는 고대 로마건축의 가장 큰 특징인 축조기술의 발달에 접근하였고, 이것은 당시까지 건축에 대한 관념론적인 이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토목공학의 성과를 고대 로마건축의 본질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고대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하려고 한 것이다. 피라네시는 기술의 우위를 기초로 하여 미학적인 우위로 주장을 옮겨갔다.
『델라 만니피첸차』에서 피라네시는 르루아와 다른 프랑스의 신고전주의자들이 주창했던 그리스건축의 이상성에 대해 개별적이고 비판적으로 분석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그리스건축이 목조건축을 석조로 계승함으로써 건축재의 본질이 현상학적으로 왜곡되었음을 밝혔다. 동시에 이것으로 인해 파생되었던 여러 축성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피라네시는 신고전주의자들이 이론적 근거로 삼았던 비트루비우스의 원리를 재정리하여 로마의 건축이 오히려 더 원리적인 것이며, 건축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더 우수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피라네시는 에트루리아의 엄격하고 숭고한 전통을 이어받은 고대 로마건축이 자율적인 것임을 명시했으며, 또한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이룩한 초인적인 건축유산을 공포에 가까운 경외심으로 재현해내었다. 그의 상상력이 재현한 지하의 구조물이나 내부의 거대한 석조구축물은 동시대에 에드먼드 버크가 숭고미의 특징으로 들었던 여러 조형적 요소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피라네시는 고대 로마건축의 우수성을 그리스의 우아함에 비견되는 숭고함에서 찾았으며, 이 숭고함은, 피라네시에게는, 환경에 맞선 고대 로마의 건축기술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다.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in Rome, there was a historical incident, so-called 'the quarrel between ancient Greece and Rome' that was ahead of the Neo-classicism. A few scholars like Winckelmann and LeRoy sat up the ancient Greece as the best canon for the art. On contrary the art of the ancient Rome began to be regarded as a regressive imitation. Piranesi was the extreme one of keen Antagonists against that movement.
Although from that time till today Piranesi is known as the best printmaker of the 18th century, he called himself rather as architect. Earning from his familiar profession he was almost passionately interest in architecture. Therefore his almost works related with the architecture. With two representative works Piranesi ran in the frontline of the debate. At that time, when he published Antichit? Romane (1756) and Della Msgniticenza (1761), the trend of philhellenism became more and more general. On the other side many italian scholars tried to announce the originality and the independency of the ancient roman art and Piranesi became their spokesperson in the quarrel. Antichit? Romane started with the quarrel and Della Magnificenza was Piranesi's ultimate argument against to the phil-hellenist.
Piranesi learned ancient history and architecture from scholars of Italian Enlightenment which was based on the archeological empiricism and scientific rationalism. Piranesi brought up all he acquired to great issue in his subjective imagination. He got the experience about the architectural technic from his uncle Matteo Lucchesi. From Giovanni Poleni, a famous polymath at the time, he learned the technical achievements of the ancient Rome and Carlo Lodoli, a franciscan Monk and a founder of the venetian Neo-classicism, teach him the phenomenological purism of the architecture. Antichit? Romane was the first result from these education and with this work Piranesi propagated the superiority of the Roman architecture which had various and durable methode of building and leaved great achievement of civil engineering. So Piranesi accessed to the development of the architectural technic that is the best character for the ancient Roman architecture. This opened him new horizon beyond the ideal theories dominated until that time. In other words he define the achievement of civil engineering as the essence of the roman architecture and with this criteria he would compare the other ancient architectures with the roman. For Piranesi the superiority of the technic means the same of aesthetic.
Through the Della Msgnificenza Piranesi analyzed critically and concretely the ideality of the Greek architecture which LeRoy and other french Neo-classicists insisted. On the basis of this analysis he revealed that the Greek architecture was phenomenological distortion of the essence of material by mere inheriting of the wooden architecture in the stone. At the same time he pointed out a few Problems on the architectural construction. Above all Piranesi redefined the architectural principles of Vitruvius, on which the Neo-classicists theoretically depended on, and he qualified the Roman architecture more principal and aesthetically better then the Greek.
Piranesi stated through his two opus magnum, that the ancient Roman architecture was born in the lofty and sublime tradition of the Etruscan architecture and therefore authentic. For that object he reproduced the superhuman architectural heritage with awesome admiration. The substructure presented or the hugh stonewall by his imagination accord with many elements which belong to character of the sublime that Edmund Burke mentioned in the same period. Piranesi found the superiority of the Roman architecture in the sublime on contrary to the grace of the Greek architecture. And this sublime, for Piranesi, was established by the technology with which the ancient Roman struggled to the rough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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