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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사상의 형성과 전개 Ⅰ- 국권회복(1945년) 이전 단군민족주의를 중심으로 - =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Shin Ik-hee's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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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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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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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 Ik-hee, who grew up in the aggression of Japanese imperialism, was greatly influenced by the Minzokjuuiza(민족주의자) such as Joo See-Kyung in the realization of the foreigner teachers' despair of Korean people and invasion of Japanese imperialism in the English language department of the foreign language school. Since then, based on the Minzokjuui(민족주의), he organized the "Korean Student Association in Japan" at the time of studying at Waseda University in Japan. Especially, his time of studying abroad can be found meaning that he met comrades of Minzokjuuitic struggle(민족투쟁) such as Jeong Se-yoon, Song Jin-woo, Moon Il Pyung, An Jae-Hong, Lee Kwang-soo, In addition, Shin Ik-hee spent the rest of his life in raising national consciousness(민족의식) through the tour of Guangdong uisook and football clubs in Korea. Particularly, I met Park Rho-ncheon in Waseda University in the first semester of 4th grade and envisaged a military battle.
After returning from Japan, Shin Ik-hee taught in Dongmyung school, Choongdong school, Boseong Law Commercial School and so on, and sought career. He went to Shanghai in November 1918 to prepare for the 3.1 struggle. It was a historical event that determined his life. Especially in Shanghai, the meeting with the key forces of Daejonggyo(大倧敎) including Lee See-yong, Lee Dong-nyong and the Minzokjuuitic(민족주의적) atmosphere of the interim government focusing on Dangun seemed to play a crucial role in returning to Daejongyo. It is noteworthy that the human network with the Daejong people formed at that time played a decisive role in the process of Minzokjuuitic struggle in china.
일제의 침략 속에서 성장한 신익희는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에서 외국인 교사의 한국인멸시 풍조와 일제의 침략이라는 현실 속에서 주시경 등의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이후 그는 민족주의에 기반하여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재일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고 『학지광』을 발간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였다. 특히 그의 유학 시절은 정세윤·송진우·문일평·안재홍·이광수·김양수·장덕수 등 이후 민족투쟁의 동지를 만났다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신익희는 방학을 이용하여 국내에서 광동의숙·축구단 순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의 고양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와세다대학 4학년 1학기에 박노천을 만나 의병투쟁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신익희는 일본에서 귀국 후 동명강습소·중동학교·보성법률상업학교 등에서 교사를 하면서 진로를 모색하였다. 그는 3.1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1918년 11월 상해로 갔다. 이는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히 상해에서 이시영·신익희·이동녕 등 대종교의 핵심세력과의 만남과 단군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민족주의적 분위기는 그가 대종교로 귀의하는 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특히 이 때 형성된 대종교인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는 그의 중국 민족투쟁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신익희는 임시정부의 한계 극복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실패한 후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특히 1934년 결성된 한국혁명당은 신익희의 정치세력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한국혁명당은 만주 한국독립당과 결합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후 그는 1935년 ‘민족혁명당’,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1940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 등 좌파성향의 독립투쟁세력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선택한 신익희는 결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가 임시정부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사상이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신익희의 민족주의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단군민족주의’였고, 특히 민족투쟁세력 가운데 대종교인들이 핵심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그의 독립투쟁은 대종교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신익희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활동은 대종교의 역사관·인사들과 깊은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차원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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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9-07-15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The Historial Association of Soong-sil -> The Historical Association for Soong-Sil | KCI후보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75 | 0.75 | 0.6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8 | 0.5 | 1.348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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