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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만식 = The Pyongannamdo Preparation Committee for National Construction and Cho Man-Sik
저자
박명수 (서울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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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4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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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37-77(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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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dy of Korean history after liberation from Japan tends to start from the premise that left-wing politicians had dominant power in the Korean political situation from 1945 to 1948. Such perception is based on the argument that the Preparation Committee for National Construction(PCNC) in Seoul, led by Yo Unhyong who was a middle-left figure, had power and great influence over the whole Korean society. However, having a glimpse of PCNCs throughout Korea leads us to the recognition that this premise is overly simplistic. A close examination of the Pyongannamdo PCNC which was organized in Pyongyang, the capital city of Pyongannamdo and the center of whole north Korea, by Cho Mansik who was a Christian nationalist and most important leader in the area, will help us understand the overall situation of Korea.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establishment, organization, activities, and dissolution of Pyongannamdo PCNC focusing on Cho Mansik.
Although Cho Mansik used the title PCNC like Yo Unhyong, there were great differences. Unlike the PCNC in Seoul initiated by Socialists, the PCNC in Pyongyang acknowledged the legitimacy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China and aimed to maintain security temporarily. General members of Pyongannamdo PCNC were politically right-wing nationalists and religiously Christians, participated in some sort of anti-Japanese movements in the colonial period, and managed business as responsible citizens. The activities performed by Pyongannamdo PCNC was limited, due to the fact that Japan did not transfer its governmental power and that the Soviet army dissolved the PCNC right after its occupation in north Korea and organized the People’s Committee in which communists had the initiative. Nevertheless the 10 days after liberation led by Cho Mansik was a peaceful period, such as to be refered as the “golden era of liberation”This discussion shows that the intervention of Soviet troops was a decisive factor that caused the northwest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o flow into hands of the left-wings. Therefore, claims of the left-wings that the People's Committee was formed voluntarily by the residents of North Korea should be thoroughly reconsidered.
해방 이후 한국사 연구는 대체로 해방 정국에서 좌익이 우세하였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런 인식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중도좌파인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위원회가 한국 사회를 이끌어갔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해방 직후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를 전국적으로 조망하면 이같은 결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특히 북한을 대표하는 도시 평양에서 조직된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와 그것을 이끌었던 기독교계 민주주의자 조만식에 대한 연구는 해방 직후 한국의 전체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평양의 기독교계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창설과정, 조직, 활동, 그리고 해산과정을 살펴보았다.
비록 조만식이 서울의 여운형과 같이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서울의 여운형과는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다. 평남 건준은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서울의 건준과는 달리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일시적으로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주(主) 사명으로 하였다. 평양 건준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대부분 정치적으로는 우익계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고, 일제강점기 항일경력도 있으면서, 사회적으로는 책임 있는 시민생활을 감당하는 사업가들이었다. 일본이 정권을 인수해 주지 않았고, 또한 소련군이 건준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평양 건준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조만식 주도의 해방 10일은 “해방황금시대”라고 불릴 만큼 평화로운 기간이었다.
이상의 논의는 결국 소련군의 개입이야말로 해방 직후 한반도 서북 지방이 좌익으로 흐르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 형성된 인민위원회가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단체였다는 자파들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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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5-04-21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The Society For Korean Church History -> The Society of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n Korea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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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43 | 0.43 | 0.57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6 | 0.64 | 0.945 | 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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