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한국노병회의 조직과 광복활동 = "Korea Working Soldiers Association(Nobyunghwey)" and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저자
양성숙 (국립경찰박물관)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97-233(37쪽)
KCI 피인용횟수
1
제공처
"Korea Working Soldiers Association" was an organization aimed at independence movement by means of armed struggles after fostering 10,000 working soldiers and raising 1 million won for 10 years. To this end, Jo, Dong-ho, Kim Ku, Lee, Yoo-pil, Yeo, Un-hyung and Jo, Sang-sup established the Association on October 28, 1922 after launching an inauguration ceremony in Shanghai China. Korea Working Soldiers Association made various efforts to raise the fund for war expenditure as the operation of an independence army required enormous amount of capital for training more than 10,000 soldiers. The Association might have achieved a remarkable outcome if the activists for the national independence were full of intensified patriotic ardor as they had been during the period when the Korea's Interim Government in Shanghai was first set up. To our regret, the Association turned out to be a failure due to splits & conflicts between 'Re-construction Rarty' and 'Creative Party, and majority of the Association's members were at odds with the Interim Government. Later, Kim, Ku, who advocated the Interim Government expressed his will of resignation from the chairman post of the Association at the end of 1923. Lee Yoo-pil who succeeded the post tried to restructure the Association by attracting more members. However, the board of directors' meeting of the Association which should be held every month was held only once or twice a year, and overall activities also became dull with drastically reduced number of the members. As a result, the Association gradually turned stagnant and finally faced dissolution on Oct. 28, 1932 after 10 years of its establishment according to the decision made at the 10th regular general meeting on April, 1932. Even though the activities of the Association didn't reap much fruit, and the fostering soldiers and raising war expenditure might have sounded too ideal, the grand long- term plan of the Association clearly showed a firm determination for national independence. At the same time, the idea by the Korea Working Soldiers Association still deserves to be praised as it had a specific and great plan with a clear understanding of reality that launching independence movement definitely necessitates human as well as financial resources.
더보기한국노병회는 향후 10년 간 1만 여명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戰費를 조성한 후 무장투쟁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기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를 위해 1922년 10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조동호, 김구, 이유필, 여운형, 조상섭 등이 모여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갖고 한국노병회를 창립하였다. 여기에서 ‘노병’이란 독립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勞農的 기술을 겸비한 병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국노병회는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신체 건강하고 독립군이 될 뜻과 노공(勞工)기술을 습득할 능력이 있는 청년들을 특별회원으로 가입시켜 6개월 이상의 군사교육과 1종 이상의 노공기술을 수득(修得)시켜 독립군으로서의 ‘노병’을 양성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노병을 양성하기 위해 군사학교의 설립, 군사서적의 간행, 외국의 군대·군사학교·兵工廠에의 위탁, 강연회의 개최와 잡지의 간행, 외국의 공창·공업학교에의 위탁, 철도·輪船·旅館 등에의 위탁 등을 통한 군사교육과 노공기술교육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한국노병회는 이렇게 1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여 독립군을 편성하려면 막대한 전비가 필요하므로 한국노병회는 전비를 충당고자 다방면으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즉 그 조달방법으로 입회금·기부금·저금이자·年捐金 등을 모으기로 하였던 것이다. 입회금은 연령 40세 이상의 통상회원은 10원, 특별회원은 2원으로 하여 모두 전비로 저축하였다. 年捐金은 매년 통상회원이 3원, 특별회원이 1원씩 납부하여 그 중에서 반액은 전비로 저축하고 나머지 반액은 회의 경비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한국노병회가 결성되었을 당시는 독립운동전선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준비되던 시기였고, 이것이 성공하면 독립운동의 열기도 다시 크게 고양될 전망이 뚜렷하였다. 따라서 독립운동가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기처럼 대동단결하여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는 분위기였다면 한국노병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시정부에 대한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과 대립으로 국민대표회의는 실패로 끝나버렸고, 한국노병회 회원 다수가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에 가담하여 오히려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따라서 임시정부 고수파인 김구는 1923년 말에 한국노병회의 이사장 직책을 사임할 뜻을 표했다. 김구에 이어 한국노병회의 이사장이 된 이유필은 회원을 增募하여 노병회를 개편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매달 개최해야 할 이사회는 1년에 1∼2회 정도만 개최되었고 전반적으로 활동이 침체되었으며 회원도 크게 감소했다. 한국노병회의 침체 이유 중 하나는 한국노병회 통상회원의 입회금이 10원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의 열악한 빈곤상태를 고려하면 매우 큰 부담이었다. 특히 이유필 체제의 한국노병회에는 그 이전의 회원들이 회비를 체납했을 뿐 아니라 신입회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노병회는 이렇게 침체일로를 걷다가 1932년 4월 제10회 정기총회에서 한국노병회 창립 만 10년이 되는 같은 해 10월 28일 해산하게 된 것이다. 비록 한국노병회의 활동은 성공하지 못했고 노병의 양성이나 막대한 액수의 전쟁비용 축척도 막연한 이상론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외형적인 평가와는 달리 그 원대한 장기적 계획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겠다는 뚜렷한 독립의지를 느낄 수 있...
더보기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3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재인증) | KCI등재 |
201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후보 |
201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2015-12-01 | 평가 | 등재후보 탈락 (기타) | |
201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 KCI후보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0-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