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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내면 청학리 일대의 공간성 변천 연구 -의령남씨 세거지 도곡(陶谷)과 조선 후기 남용익의 별서를 중심으로- = A Study of the Changes in Spatiality in the Cheong-hak-ri Area of Byeol-nae-myeon
저자
발행기관
경인교육대학교 기전문화연구소(THE INSTITUTE FOR KYEONGKI CULTURAL STUDIES Inchon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51-74(24쪽)
제공처
The Cheong-hak-ri Area of Byeol-nae-myeon, Nam-yang-ju, once known as Dogok(陶谷), is steeped in history, having been inhabited by the Ui-ryeong-Nam clan(宜寧南氏) from the Joseon Dynasty to the present. In the late Joseon Dynasty, Nam Yong-ik(1628-1692), who held the position of I-jo-pan-seo(吏曹判 書), managed several villas here and interacted with his colleagues. Su-rak-mountain(水落山) Ok-ryu Waterfall(玉流瀑布) and the Gan-pok-jeong(看瀑 亭) built next to it became a kind of marker symbolizing Ui-ryeong-Nam clan and Nam Yong-ik.The reason why the Ui-ryeong-Nam clan of Ui-ryeong(宜寧), Gyeong-sangnam-do, formed a settlement and seon-yeong(先塋) in Dogok was that Nam-jae(南在, 1351-1419) and Nam-eun(南誾, 1354-1398) were granted sa-pae-ji(賜牌地) and Large farmland(田莊)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n, starting with Nam Hyo-ui(南孝義, 1474-1551), its character as a clan village(集姓村) became clear, and in the late Joseon Dynasty, Nam Yong-ik, who was at the beginning of the No-ron(老論) Gyeong-hwa-se-gok(京華世族), traveled back and forth between Seoul and his hometown. Nam Yong-ik traveled back and forth between Seoul and his hometown, seeking refuge in his hometown whenever he was in political hot water. After the age of 50, when he actively advocated for seclusion, he concentrated on building a separate houses, assuming that he could return to Seoul. The real guardians of the land were his Bang-gye(傍系) descendants, who farmed, lived, and maintained their daily lives there It is believed that life in Se-geo-gi(世居地) was similar until the 80s, when rural villages centered on the same sect were maintained. Throughout the Japanese occupation, the Korean War, and modernization, clan village(集姓村) remained culturally unchanged until the 90s, when a turning point occurred. At the core of the transition was a change in the form of housing: apartments. As a large number of anonymous people quickly moved in, taking up space on the ground and in the air, the neighborhood's character as a village community was quickly eroded. When the village community collapsed, so did the tradition of nickname of house (宅號), which lasted until the 80s. Now, those who remain live in an era of communal housing, where people call each other □dong □ho. This article, which aims to be a study of spatiality, concludes by record the nickname of house, which few people will remember. This could be a meaningful task if we reflect on the disappearance of urban and suburban clan village over the course of modern history.
더보기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일대는 과거 도곡(陶谷)이라 불렸다. 이곳에는 조선 전기부터 현재까지 의령남씨(宜寧南氏)가 세거(世居)해온 역사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조판서를 지낸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이곳에 여러 채의 별서(別墅)를 경영하며 동료들과 교류하였다. 수락산 옥류폭포와 그 옆에지어진 간폭정(看瀑亭)은 의령남씨와 남용익을 상징하는 일종의 표식이 되었다. 경상남도 의령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의령남씨가 도곡에 집성촌과 선영(先塋)을 형성하게 된 것은 조선 초 남재(南在, 1351-1419)와 남은(南誾, 1354-1398)이 사패지(賜牌地)와 전장(田莊)을 하사받으면서부터였다. 그러다중종 연간 활동한 지재공(志齋公) 남효의(南孝義, 1474-1551)를 기점으로 집성촌으로서의 성격이 명확해졌고, 조선 후기에는 노론 경화세족의 시발점에있는 남용익이 도성과 고향을 갈마들었다. 남용익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릴 때마다 고향에서 안정을 찾고 다시 서울로 향하곤 했다. 은거를 적극적으로 표방한 50세 이후부터는 이곳에 별서를집중적으로 경영하였으나, 이 역시 재경(在京)을 전제에 둔 행위였다. 기사환국으로 유배 가기 전까지 그의 행보를 살피면 시간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전장을 실질적으로 지켜온 이들은 그곳에서 농사짓고 살며 일상생활을 유지해나가던 그의 방계 후손들이었다. 세거지의 생활상은 동종(同宗) 중심의 농촌 마을이 유지되었던 80년대까지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성촌이라는 공간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근대화 시기를 거치면서도 문화적으로는 큰 변화를 겪지 않다가 90년대에 들어서야 전환점을 맞이한다. 전환의 핵심에는 아파트라는 거주 형태의 변화가 있었다. 익명의 다수가 순식간에 유입되어 땅은 물론 공중까지 공간을 차지하자, 이 지역이 가진 마을 공동체로서의 성격은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다. 마을 공동체가 붕괴되자 80년대까지 이어졌던 택호(宅號)의 전통도 사라졌다.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 서로를 □동 □호라 부르는 공동 주택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공간성 연구를 표방한 이 글은 이제 기억할 사람이 거의 없을 택호와 택호로 불렸던 집이 있었던 장소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근현대사를 거치며 도성과 근교의 세거지가 사라지고 그 역사를 기억할 방법 역시 사라진 경향을 돌아보면, 이는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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