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考古學으로 본 古代 東亞細亞 王陵 = An Archaeological Perspective on Ancient East Asian Royal Tombs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7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95-125(31쪽)
KCI 피인용횟수
1
DOI식별코드
제공처
소장기관
본고에서는 고고학적인 방법으로 동아세아 왕릉의 역사적 의미와 배경에 대하여 접근하였다.
광범위한 동아세아 왕릉 가운데 필자가 직접 현지 조사를 실시한 중국의 北魏, 한국의 加耶, 新羅, 일본의 倭 왕릉을 대상으로 하였다.
유목민족으로 거대한 왕릉을 축조하지 않았던 北魏가 5세기 말 돌연 거대한 능역과 분구를 가진 왕릉이 축조한 것은 漢化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당시 거대한 왕릉을 조영한 南朝와 고구려, 나아가유목민족으로 거대 왕릉을 조영하지 않던 柔然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북위는 왕릉을 內 政과 外交에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금관가야는 4세기 왕릉의 파괴 현상이 보이는 점에서 왕통이 교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5세기 이후 대형분인 왕릉이 축조되지 않은 것에서 국력의 쇠퇴와 왕통의 교체를 추정 할 수 있다.
아라가야는 왕릉의 조영과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령군 지산동고분군과 같이 5세기 후엽 이후왕릉급 고총이 一系에 한정된 것과는 달리 왕권이 특정 수장계열에 고정되지 않고 왕릉에필적하는 왕족묘가 6세기에도 존재하는 점에서 왕권의 한계를 추정할 수 있다.
대가야는 5세기 말 이래 지산동고분군의 조영원리가 6세기 신라와 백제의 왕릉과 유사한점에서 대가야가 백제, 신라와 같은 사회발전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대가야는 왕묘의 축조 과정이 삼국의 왕릉과 유사하고 호남동부지역에 걸친 영역과 독자적인문명으로 볼 때 백제, 신라와 같은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가 5세기 초에 이르러 계획적으로 거대한 능원을 축조한 것은 내물왕이래의 왕권의확립, 세습왕권의 형성과 관련이 있으며, 외적으로는 동시기 거대 능원을 축조한 고구려, 백제와 함께 倭를 의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倭는 3세기 중엽 奈良분지에서 276m의 초대형 전방후원분인 왕릉이 출현하며 이후 일본열도 전역에 걸쳐서 전방후원분이 축조된다.
그런데 3-5세기 왕릉에는 奈良분지 내에서 同시기 같은 규모의 왕릉이 竝立하는 것에서「聖 俗 二重王制」에 의한 2인의 왕이 병립했다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더욱이 倭의 왕릉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奈良분지의 佐紀고분군에서 이동하여 大 阪평야의 古市, 百舌鳥고분군에 조영되며, 5세기 전반에는, 古市고분군과 百舌鳥고분군 사이에 교대로 조영된다. 이는 왕권이 竝立적이며 세습이 불안정한 양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상 동아세아의 왕릉의 성립과 발달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각 국은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에 처해있었음에도 거대 왕릉의 성립이라는 공통된 과정을 보이는데, 이것에서 각국이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왕권의 확립과 성장이라는 공통된 사회발전과 관련하여 왕릉이출현함을 알 수 있었다
The aim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and background of East Asian royal tombs from an archaeological perspective.
The royal tombs evaluated herein include sites in the Northern Wei region, China, as well as Gaya and Silla in Korea, and Wa in Japan. All of these sites were investigated in-situ by the author and were then selected for further analysis as a representative sample of the wide range of royal tombs currently known from East Asia.
The nomadic peoples of the Northern Wei dynasty did not initially construct large royal tombs but began building these kinds of structures, including boundaries and massive mounds, in the late fifth century(CE). Although these structural changes were a component of the sinicization policies enacted by the Northern Wei dynasty, they can also be viewed as a response to changes initiated by the southern and Koguryo regimes that also built large royal tombs in concert with the Rouran Khaganate. These nomadic people did not build large royal tombs, but the Northern Wei did use these structures for both their internal affairs and diplomacy.
The destruction of royal tombs in the fourth century CE suggests a variation in the royal line within Geumgwan Gaya; thus, the absence of new, large royal tombs from the fifth century CE onwards is also indicative of a decline in state power and a switch in the royal line.
The existence of tombs In Ara Gaya that match the grandeur of royal tombs even as late as the sixth century CE reveals that royal authority was limited, however, and not exclusively held by a single ruling clan . This contrasts with the Jisan-dong tomb complex at Daegaya where royal-class tombs were limited to a single ruling clan from the late fifth century CE.
Thus, from this period onwards, the Daegaya royal tombs in the Jisan-dong complex were constructed along the same lines as those of sixth-century Silla or Baekje examples. This suggests that Daegaya tombs reached a level of social development comparable with Silla or Baekje. Judging by the similarity in royal tomb construction compared to the Three Kingdoms as well as from its territory and unique civilization in the southeastern part of the Honam region, Daegaya most likely developed into an ancient state just like Silla and Baekje.
It is clear that Silla that massive tombgardens were built methodically from the early fifth century CE in this region. This was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of royal authority and hereditary succession from the reign of King Naemul onwards, but externally can be viewed as Silla’s response to contemporary Koguryo, Baekje, and Wa in the context of the construction of large tomb gardens.
Keyhole-shaped Wa tombs were constructed throughout the Japanese islands beginning with the appearance of a gigantic 276-meter keyhole-shaped tomb in the Nara Basin in the mid-third century CE.
From the third to the fifth century CE, royal tombs of equal date and size coexisted in the Nara Basin, leading some scholars to hypothesize that kings reigned in pairs according to the “secular-spiritual dual monarchy” system.
In addition, during the late fourth to the early fifth century CE, the location of Wa royal tomb construction moved from the Saki tomb complex in the Nara Basin to the Furuichi and Mozu tomb complexes in the Ōsaka Plain. In the first half of the fifth century CE, Wa royal tombs were constructed alternately between the Furuichi and Mozu tomb complexes. Such frequent relocation of royal tomb construction sites indicates dispersed royal authority and the instability of hereditary succession.
The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royal tombs in East Asia was examined in this paper. The fact that countries with different historical backgrounds all underwent the shared process of constructing large royal tombs indicates that the emergence of these structures was motivated by common social development and the establishment of royal authority.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1-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7 | 0.7 | 0.72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72 | 0.89 | 1.572 | 0.26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