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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3공화국의 식민주의 이념 – 1885년 7월 하원에서의 논쟁을 중심으로 = Idée coloniale sous la IIIe République Française - débat à la chambre des députés en juillet 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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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28 juillet 1885, Jules Ferry, ancien président du conseil des ministres et revenu au simple statut de député(le cumul des mandats étant alors permis), prend la parole à la tribune de la Chambre des Députés. Ayant l’intention de soutenir la politique coloniale du nouveau cabinet présidé par Henri Brisson, Jules Ferry met en avant de manière cohérente une théorie de la politique coloniale. Celle-ci repose, préciset- il, sur des «idées économiques», des «idées d ’ordre politique et patriotique », et des «idées de civilisation de la plus haute portée.» Ainsi s’ouvre le débat entre partisans et adversaires de la politique coloniale du gouvernement.
Jules Ferry argumente d’abord sur les avantages économiques que la France peut tirer des colonies : «La fondation d’une colonie, affirme -t-il, c’est la création d’un débouché. […] il suffit que le lien colonial subsiste entre la mère-patrie qui produit et les colonies qu’elle a fondées, pour que la prédominance économique accompagne et subisse en quelque sorte la prédominance politique.» Le 30 du mem̂e mois, Georges Clemenceau répond à Jules Ferry, «prononçant l’un des plus vigoureux réquisitoires contre la colonisation qu’ait jamais entendus une assemblée française», selon l’expression de Jean Lacouture et Dominique Chagnollaud. En qualifiant l’argument de M. Ferry de «fantasgomarie pure», car «les débouchés ne s’ouvrent pas à coup de canon», Clemenceau préconise de tenter l’acheteur par «le bon marché de fabrication et le bas prix des transports», au lieu de dépenser les impot̂s des Français en partant faire la guerre à des pays lointains.
Et puis, sûrement obnubilé par l’idée de «décadence» du pays, et animé d'un patriotisme insensé, Jules Ferry invoque l’intéret̂national pour dire la nécessité de conquérir de nouvelles terres. «Puisque la politique d ’expansion coloniale est le mobile général qui emporte à l ’heure qu’il est toutes les puissances européennes », proclame-t-il, il faut que la France en prenne son parti, sous peine de descendre «du premier rang au troisième ou au quatrième.» Par contre, Clemenceau et les adversaires de l’entreprise coloniale tel que Frédéric Passy, préfèrent la politique du «rayonnement pacifique» et celle du «pot-aufeu ».
Le troisième argument de Jules Ferry est que la France doit continuer à faire des expéditions lointaines, car les races supérieures ont «le devoir de civiliser les races inférieures.» De cette «justification après coup » des faits accomplis(expéditions à Tonkin et Madagascar), Clemenceau et ses amis s’indignent au nom du principe républicain. Et ayant «une préscience des méfaits de la colonisation», selon l’expression de Michel Winock, Clemenceau réfute l’idée de la prétendue «mission civilisatrice » de Jules Ferry : «La conquete que vous préconisez, ̂ c’est l’abus pur et simple de la force que donne la civilisation scientifique sur les civilisations rudimentaires, pour s’approprier l’homme, le torturer, en extraire toute la force qui est en lui au profit du prétendu civilisateur.» Ce sont les argument de Jules Ferry qui remportent la victoire nette ; le crédit demandé par le gouvernement étant approuvé par le vote des députés. On sait pourtant que l’histoire coloniale de la France qui a abouti à la décolonisation massive de ses anciennes colonies, donna finalement raison aux réfutations de Georges Clemenceau ainsi que d’autres adversaires de la politique coloniale.
1885년 7월 25일, 마다가스카르 원정에 사용할 예산안이 하원에 제출되었다. 이 예산안을 두고 이날 시작된 논쟁은 27일, 28일, 30일로 이어졌다. 28일, Heri Brisson 내각의 식민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하원 연단에선 Jules Ferry는 식민 정책을 시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장시간에 걸쳐 밝혔다. 30일, 그의 정적 Georges Clemenceau가 연단에서서 이틀 전에 Ferry가 행한 발언을 맹렬히 공격했다. 여러 의석에서 의원들이 이 두 사람의 논쟁에 가세했다. 이 논쟁이 우리의 주요 분석 대상이다.
28일, Ferry는 먼저 경제적 이득의 측면에서 식민지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은 판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식민지를 확보해서 그곳에서 «정치적 우위»를 가지게 되면, «경제적 우위»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게 된다. 유럽 국가들과의 경쟁, 보호무역주의 등으로 위기를 맞은 프랑스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있는 최고의 방안은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함으로써 프랑스산 제품의 «판로»를 여는 것이다. Ferry의 이런 주장에 대해 Clemenceau는 «판로는 포격으로 열리지 않으며», 식민지는 프랑스에 실익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는 재정을 국내에 투자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상품의 생산비와운송비를 낮추어서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판로를 확대하는 편이 옳다고 주장했다.
Ferry는 국익의 측면에서도 식민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영국과의식민지 쟁탈전에서 패배하고 보불전쟁에서도 패배함으로써 위상이 추락한프랑스를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나 해군의 전략 면에서도 식민지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식민지를 확장하려는 유럽 열강의 경쟁에 가세하지 않으면 프랑스는 «1등에서 3등이나 4등으로 추락»할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Clemenceau는 Ferry가 권고하는 것은 «전쟁을 통한 영향력확대»라고 비난하면서, «평화적인 영향력 확대»야 말로 국가를 위대하게만드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를 재건할 수 있는 참된 방법은 «사치스러운 지출»일 뿐 식민지 원정을 포기하고 군대를 재조직하고 내치(內治) 정책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Frédéric Passy 의원도 내실을 다져나가면 프랑스의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확대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랑스인들은 해외로 진출해서 그곳의 열등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소위«문명화 사명 mission civilisatrice »을 완수해야 한다고 Ferry는 주장했다. 그는 «우등 민족들은 권리가 있습니다. 우등 민족들은 의무, 즉 열등민족들을 문명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Jules Maigne, Camille Pelletan 같은 신념에 찬 공화주의자들은 «문명화 사명»이라는 것이 공화주의적 보편성의 원리, 즉 인권은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다는 원리에 어긋난다고 지적했으며, Clemenceau는 «문명화»라는 것의 본질은 폭력이라고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이 소위 «야만인들»을 정복한 역사 속에서는 «폭력, 마구 자행된 갖가지 범죄, 압제, 넘쳐흐른 피, 정복자에게 억압을 받고 괴롭힘을 당한 약자»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Ferry가 «문명화라고 일컫는 것의 역사»였다.
Ferry가 제시한 «대단한 식민주의 독트린»은 Clemenceau가 말했듯이, 프랑스 정부가 마다가스카르나 통킹에서 이미 행한 정복 작전에 대한 «사후적 정당화»였으며, «만들어낸» 주장이었다. 그리고 «문명화 사명»이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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