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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論文) :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 전쟁정보(戰爭情報)와 조선의 대응(對應) = The Warfare Information and Response of Joseon just before the Imjin War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4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911.4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1-45(25쪽)
제공처
조선의 공식적인 외교사절이었던 通信使와 일본의 공식적인 외교사절이었던 國王使를 통하여 조일양국은 상대국에 대한 정확한 정보수집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조선은 對일본 정보수집에 있어서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1443년 통신사행을 마지막으로 1590년 통신사행까지 일본 京都에 이르지 못하는 150여 년간의 일본에 대한 정보공백시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왜관과 대마도를 통한 제한적인 정보는 정치·경제적 목적 및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되어 졌고, 조선조정에서는 정보의 왜곡과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정보공백시기를 지내오면서 조선을 향한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위협에도 불구하고 위기인식의 혼선을 가져왔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은 1590년 통신사행과 이후 일본의 직접적인 위협에 대해 사신을 통하여 명에 보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명에 보고를 하기도 전에 복건의 상인 許儀後에 의해 일본이 명을 치려고 한다는 정보가 투서로 인해 중국내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점차 공식화되어 중국내부에 퍼져나갔다. 조선조정에서는 이러한 외부상황의 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의 해명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잃게 되었으며, 이는 명으로 하여금 전쟁초기 전세를 관망하며 파병을 지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467년 應仁의 亂을 시작으로 100여 년간 계속된 일본의 전국시대를 평정한 豊臣秀吉은 對馬島主에 ``조선침략``과 관련한 명령을 내렸다. 대마도주는 풍신수길의 조선국왕 복속에 대한 정보를 왜곡하여 통신사 파견을 조선에 요청하게 되었다. 조선은 일본 내부의 정세와 전쟁정보의 진위확인을 위해1590년 통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신사행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고, 민심이 동요될 것을 우려한 조선조정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정보수집과 활용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조선의 위기인식의 혼선은 150여 년간의 정보공백시기 동안 일본에 대한정보를 제대로 입수하지 못하고 활용도 못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정보공백시기 이후 파견된 1590년 통신사행은 동일한 정보에도 다른 해석을 하였고, 위기인식의 혼선에 따라 전쟁이 예견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차원의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임진왜란 개전초기 참패로 나타났다.
더보기This study aims to 1) examine warfare information of Joseon just before the Imjin War in diplomatic relation between Ming and Japan as an important factor of a complete defeat of the initial stage of the war, 2) to investigate the war preparation process of Joseon shown in the collection of information and decision making of utilizing collected information in an official diplomatic relation, and finally 3) to verify the cause of disastrous defeat in the initial stage was incompetence of collecting information and utilizing it which led to confusion and misjudgement of crisis awareness of Joseon. Both Joseon and Japan could collect accurate information through their official diplomats of Tongsinsa(通信使) of Joseon and Gukwangsa(國王使) of Japan respectively. However, before the occurrence of the war, Joseon came across its limitation in collecting information against Japan, because there was 150 years information gap between 1443 and 1590 where no Tongsinsa reached to Japan``s capital city. In particular, limited information from Waegwan and Tsushima, the only available source during the gap period tended to be distorted for a political and economical purpose or interest which caused a confusion of crisis awareness of the royal court of Joseon despite the direct threat of Japan. Meanwhile, Joseon that belonged to an international of East Asia had encountered a situation to report collected Information to Ming as to Tongsinsa of 1590 and the direct threat of Japan. However, even before the report reached to Ming, a Fujian merchant Heo Euihoo (許儀後) sent a letter to inland China and spread out throughout China as a fixed fact. In order to resolve such an external transition, the royal court of Joseon had to actively reply the request of explanation from Ming. Nonetheless, Joseon lost trust with Ming which became a crucial element that Ming did not dispatch troops in the initial stage of the war. Toyotomi Hideyoshi who unified Japan from the age of rival warlords began from the revolt of Eungin(應仁) of 1467, gave an order the ``invasion of Joseon`` to the warlord of Tsushima. He distorted Toyotomi Hideyoshi``s information of conquering Joseon and requested the dispatch of Tongsinsa to Joseon. The royal court of Joseon with no clear understanding of Japanese political environment sent Tongsinsa to Japan in 1590 to see the environment of Japan and to check the reliability of breaking out a war in a response to the request of Gado-Ibmyeong (假道入明) or Jeongmyeong-hyangdo(征明嚮導). But, the members of Tongsinsa made contradictory reports to each other and in fear of agitation of people, the royal court misjudged that there would be no war. It clearly demonstrated the limits of collecting and utilizing information on Japan. The confusion of crisis awareness began from the information gap of 150 years during which neither information was properly collected nor utilizing information was properly carried out. After those period, Tongsinsa gave contradictory interpretations which worsened the confusion. Although there was an imminent threat of a war, Joseon could not prepare the war appropriately which brought out a disastrous defeat in the initial stage of the Imji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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