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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실효지배의 증거로서 민관합동 학술과학조사 - 1947년 및 1952-53년 (과도)정부·한국산악회의 울릉도·독도조사를 중심으로 - = The Ullengdo-Dokdo Field Research Expeditions of 1947 & 1952-1953 Evidencing Korea's Effective Control
저자
박현진 (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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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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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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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일본이 독도야심을 노골화하자 과도정부 안재홍 민정장관(民政長官)은 1947년 8월 독도 수색위원회를 조직하고 6명의 중앙․지방정부 관리로 구성된 공식 독도조사단을 결성․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또 ‘조선산악회’(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산악회’로 개칭) 송석하 회장에게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대규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구성, 과도정부의 독도조사단과 함께 독도에 대한 민관합동 학술과학조사를 실시하도록 지시․위촉하였다. 이에 따라 과도정부 조사단 6명과 한국산악회 독도조사대 소속 전문가 63명(이 가운데 12명은 공무원) 및 지원인력 등 총 80명으로 구성된 제1차 울릉도․독도학술조사대는 광복 후 처음으로 독도에 상륙, 측량(목측), 지질․광물․동식물 조사와 표목설치 등 평화적 국가(정부)기능의 행사를 통해 당시 무인도였던 독도에 대한 실효지배를 현시하였다.
1947년 독도 학술과학조사에 참가했던 국사관장 신석호는 이듬해 한국․일본의 문헌․기록, 일제 강점시대 일본해군성이 발행한 『조선연안수로지』, 일본학자의 연구와 울릉도 주민의 증언 등 구체적 근거와 증거를 원용하여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입증하는 논문(“독도소속에 대하여”)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독도영유권에 관한 역사적․지리적 근거를 밝혀 독도영유권 연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고, 이후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 연구의 근거와 방향, 출발점을 제시하였다. 그는 또 울릉군청에서 1906년 울도군수 ‘심흥택 보고서’를 최초로 발견하여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입증하는 중요한 물증으로 제시하였다.
신석호의 논문은 이후 이한기, 송병기, 신용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이 이들의 저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또 지질․광물반의 옥승식은 독도에 대한 목측(目測)과 지질조사를 실시하고, 조사 이듬해인 1948년 3월 15쪽 분량의 지질․광물반 공식보고서 「울릉도, 독도 조사보문(調査報文)」을 제출하여 독도의 지질적 특성을 조사․평가하였다. 조사대는 또 독도에서 바다사자의 일종인 가제(海驢)를 포획․조사하고 약 50여종의 동식물 표본을 채집․정리하여 이들 표본이 울릉도에 서식하는 동식물과 같은 계통임을 확인하였다. 조사대는 또 독도의 동도에 과도정부와 조선산악회 공동명의로 2개의 표목을 설치하여 독도가 한국령임을 표시하였다.
1947년 제1차 민관합동 독도조사대의 법적 성격․지위와 관련, 우선 한국산악회의 조사대 파견이 민정장관의 지시․위촉으로 이루어진 점, 과도정부의 공식 독도조사단이 파견된 점, 한국산악회 조사대원 가운데 12명의 전문가가 당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조사대원들이 포항에서 조선해안경비대에서 제공한 ‘대전환’호에 승선, 울릉도 도동항을 거쳐 독도에 도착한 점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광복 후 최초의 독도조사는 정부의 공식 또는 민관합동 학술․과학조사로 간주된다.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의 발효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독도도발을 본격화하자 우리 정부는 1952년 및 1953년 2차례에 걸쳐 한국산악회에 추가적인 독도조사대를 결성․파견토록 지시․위촉하고 예산 등 범정부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1952년 9월 2차 독도조사대는 미 공군의 독도 폭격연습으로 인해 독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이어 1953년 10월 제3차 울릉도․독도조사대는 범정부적...
After liberation, south Korea was reeling from and healing the wounds from the decades-long draconian colonial rule. As both south Korea and Japan were then ruled by the Allied Powers' occupation authorities, from 1947 onwards Japan attempted illegal landings on Dokdo, coaxing at the same time the Tokyo-based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into misperceiving Dokdo as constituting Japanese territory. Japan is even suspected of having influenced SCAPIN 1778 & 2160 designating Dokdo as a target of practice bombing.
In May 1947, just one year ahead of Korean independence, the U.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proclaimed Ordinance 141 to commission the Transitional Government of South Korea(南朝鮮 過渡政府). De facto powers of administration, legislation and jurisdiction were delegated to the latter, the home straight leading up to independence. On Aug. 4, 1947, the new-born Transitional Government, headed by the Minister of Civilian Government(民政長官) Ahn Jae-hong(安在鴻), set up the Dokdo Investigation Committee and decided to dispatch an Ulleungdo-Dokdo field research expedition comprised of four central plus two provincial government officials. Such a move was intended to counter Japanese challenge to Korean title to Dokdo.
Minister Ahn also instructed the Corean Alpine Club, the national network of mountaineers founded in 1945, to organize a fieldwork mission to conduct a joint Ulleungdo-Dokdo academic and scientific research in tandem with the official expedition. A total of 12 public officials were included in the mission's 63 men-strong team of experts, thus bringing to 18 the number of public servants participating in the joint field research. The Club's president and his entourage joined the governmental expedition to embark on the Dokdo field investigation from Aug. 16 to Aug. 28, 1947, the first of its kind after liberation.
The government-led Ulleungdo-Dokdo field research, synchronized and amalgamated with the private one, therefore represents the mission's official status. The mixed research team landed on Dokdo in the morning of Aug. 20 to conduct, inter alia, botanical, zoological and biological surveys investigating Dokdo's flora and fauna and its surrounding marine environment. Three sea lion cubs were caught for research purposes. A geological and minerals survey was also carried out. The expedition set up two wooden frontier marks at a vantage point on the slope of East Islet to indicate Korean inherent territory.
The outcome of the field research was reported in ensuing public lectures, seminars and exhibitions and published in press media and academic journals. One of the salient achievements of the 1947 field research was a paper published in 1948 by Shin Seok-ho, head of the Korean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Office, who had participated in the expedition. In this celebrated paper, he invoked six counts of historical, geographical and map evidence to prove Korean title to Dokdo. His essay provided the starting point for and defined the tasks for subsequent legal as well as historico-geographical research on Korea's Dokdo dominium.
The Club further launched 1952 and 1953 expeditions during the Korean War under directions and liberal logistical support and patronage from the government. Unfortunately, the 1952 expedition failed to land on Dokdo because of the ongoing practice bombing by the U.S. air force against it. Undaunted, the Club organized the third mission the next year to install a wooden and a granite marker on East Islet, while conducting geological and geomorphic as well as biological surveys.
Of particular note and importance in the third expedition was the surveying of Dokdo conducted by Park Byeong-ju. Staying overnight on Dokdo, he was assisted by such an instrument as a transit compass to calculate the respective heights, sizes and perimeters of the two islets. In his field research memos, Park recorded that Dokdo was visible from Ull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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