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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조국의 노래』를 통해 본 趙文紀의 독립운동 = Cho Mun-Gi's Independence Movement Seen through "Sad Song of My Fatherland"
저자
조성운 (동국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1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09-239(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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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제공처
This paper examines Cho Mun-Gi's anti-Japanese national movement on July 24, 1945, just before liberation, focusing on his memoir "Songs of Sad Fatherland. Jo Mun-Gi's anti-Japanese movement is roughly divided into leading the strike at the Kawasaki(川崎) plant in May 1943 and the Patriotic Dead of Blown Up of the Bumpingwan府民館) on July 24, 1945.
Cho Mun-Gi was forcibly mobilized to the Kawasaki plant of Japan Steel Co., Ltd. in October 1942 and returned to Korea in January 1945. In May 1943, he led the strike with Yu Man-Su at the Kawasaki plant of Japanese Steel Pipe Co., Ltd. for insulting Korean workers. After the strike, he returned to Korea in January 1945 with the help of Seo Sang-Han(서상한), organized the Korean Patriotic Youth Party in March, and launched the Patriotic Dead of Blown Up the Bumpingwan on July 24. The Korean Patriotic Youth Party was organized around people who returned home after being forcibly mobilized by Japan Steel Co., Ltd. This party had a four-stage independence movement policy for comradeship, formation of secret organizations, pro-Japanese groups, and invasion protection, and China. Japanese colonial era The Patriotic dead of blown up the Boomingwan, considered the last hero and noble struggle, was a preliminary step toward going to China and carrying out the independence movement. Later, he fled to his hometown of Suwon. He was liberated while raising funds for the Korean Patriotic Youth Party to gather comrades there.
After liberation, he participated in the campaign against the establishment of a single government and lived in prison. He was not treated as an independent merit, as he was subject to government surveillance for anti-government activities such as the attempted assassination of Lee Syngman(이승만). It was not until 1982 that he was honored as an independence merit. He began to gain public attention when Kim Hyung-Geuk(김형극) announced through various media that he led the Patriotic Dead of blown up the Boomingwan under the order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owever, he refuted and denied such fact, and the media also provided correction reports on this. After the 1990s, he launched a pro-Japanese liquidation movement while serving as the head of the Gyeonggi branch of the Liberation Society and the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Research in Collaborationist Activities. He died in 2008. In the end, his life can be evaluated as a lifetime devoted to the anti-Japanese national movement and the pro-Japanese liquidation movement.
본고는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조문기의 항일민족운동을 그의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조문기의 항일민족운동은 1943년 5월 일본강관주식회사 가와사키(川崎) 공장 파업을 주도한 것과 1945년 7월 24일 부민관폭파의거를 전개한 것으로 대별된다.
조문기는 1942년 10월 일본강관주식회사 가와사키(川崎) 공장에 강제동원되어 1945년 1월 귀국하였다. 그는 1943년 5월 조선인 노동자를 모욕했다는 것을 이유로 일본강관주식회사 가와사키(川崎) 공장에서 유만수와 함께 파업을 주도하였다. 파업 후 서상한 도움을 받아 피신을 하던 그는 1945년 1월 귀국하여 3월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고 7월 24일 부민관폭파의거를 전개하였다. 대한애국청년당은 일본강관주식회사에 강제동원되었다가 귀국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으로 동지규합, 비밀단체 구성, 친일 거두와 침략 원흉 처단, 중국행의 4단계의 독립운동방침을 갖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최후의 의열투쟁이라는 평가를 받는 부민관폭파의거는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전단계였던 셈이다. 이후 고향인 수원으로 피신하여 동지 획득을 통해 대한애국청년당의 활동자금을 마련하던 중 그는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후 그는 단정수립반대운동에 참여하여 수감생활을 하였고,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에 관련되는 등 반정부 활동을 하여 정부의 감시대상이 되는 등 독립유공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1982년에야 비로서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그가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김형극이 자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부민관폭파의거를 지휘했다는 주장을 각종 언론을 통해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반박하며, 부인하였고, 해당 언론도 이에 대한 정정보도를 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광복회 경기지부장과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친일청산운동을 전개하다가 2008년 사망하였다. 결국 그의 삶은 항일민족운동과 친일청산운동에 평생을 바친 일생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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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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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81 | 0.81 | 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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