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이희경의 민족운동과 적십자 활동 = Lee Hee-kyung's National Movement and Red Cross Activities
저자
조규태 (한성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4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57-198(42쪽)
제공처
이 논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한 이희경의 민족운동과 적십자 활동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이희경의문명개화사상의 형성과 미국 유학,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활동, 대한적십자회의 조직과 확장 활동, 독일과 미국에서의 활동과 귀국후 생활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이 연구를 위하여 첫째 독립신문, 동아일보, 매일신보, 신한민보 , 제국신문 , 황성신문 등의 신문을 활용하였다. 둘째 일제의 정보문서를 이용하였다. 셋째 안창호일기와 이승만이 신익희와 장붕과 김규식 등에게 보낸 서신, 이희경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낸 서신 등을활용하였다.
이희경은 1889년 평남 순천의 부유한 향리의 아들이었다. 그는 漢學을배우고 시무학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서울에서 감리교의 상동교회에 출석하여 이승만·박용만 등의 민족운동가와 교유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오하이오주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웨슬리대학 문학부에 들어가 교양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주립대학에 들어가 의학부에서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하고 국내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던 그는 1919년 4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체제를 정비하고, 국제사회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1919 년 7~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대한적십자회를 설립하고, 이후 국내외에 지부를 확장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1921년 6월 경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독일에서 ‘유독고려학우회’,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 미국 동부에서 유일한이 설립한 유한주식회사에 참여하여 한인 기업의 성장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건강이악화된 그는 1930년대 전반 귀국하여 의사로서 생활하다가 사망하였다.
이 글은 향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의 설립과 조직과활동에 대한 연구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으려던 활동과 이와 관련된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세력의 경쟁을 규명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또1920~30년대 재독 한인의 민족운동과 미국 동부지역에서 활동한 한인의 민족운동과 경제활동에 관한 연구의 진전에 기여할 것이다.
This thesis examines the national movement and Red Cross activities of Lee Hee-kyung, who served as the first president of the Korean Red Cross Association under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Lee Hee-kyung's formation of civilization and enlightenment thoughts,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the activities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the Provisional National Assembly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organization and expansion activities of the Korean Red Cross Association, activities in Germany and the United States, and life after returning home were reviewed.
For this study, newspapers such as the Independent Newspaper, the Dong-A Ilbo, the Maeil Sinbo, the Shinhan Minbo, the Imperial Newspaper, and the Hwangseong Newspaper were first used. Second, Japanese information documents were used. Third, Ahn Chang-ho's diary, Rhee Syng-man's correspondence to Shin Ik-hee, and Jang Boong, and Lee Hee-kyung's correspondence to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ere used.
Lee Hee-kyung was the son of a wealthy Hyang-ri in Suncheon, Pyongnam in 1889. He studied Chinese literature and English and new knowledge at Simu School. He attended the Sangdong Church of Methodist in Seoul and interacted with national activists such as Syngman Rhee and Yongman Park.
He studied medicine in the United States. After finishing middle school in Ohio, he attended the Department of Literature at Wesley University and took liberal arts classes. Then he attended Illinois State University in Chicago, where he studied medicine and became a doctor.
He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Movement in Pyongyang in 1919. In April 1919 he went to Shanghai and worked for the Provisional Assembly an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 established The Korean Red Cross under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from July to August 1919, and carried out to expand branches at home and abroad. He was also dispatched to Moscow around June 1921 to receive financial support from the Soviet Russian government. However, he did not achieve the desired results.
He participated in the 'Korean German Association' in Germany and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in the United States. In addition, he participated in the Yoohan corperation established by Yoo Il-han in the eastern United States and worked for the growth of Korean companies.
However, due to poor health, he returned to Korea in the early 1930s and died while living as a doctor.
This article will contribute to studying the establishment and expansion of the Korean Red Cross l under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is will also give help to identifying the activities tha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sought to receive support from the Soviet Russian government. This will contribute to the progress of research on the Korean national movement in Germany in the 1920s and 1930s and the Korean national movement and economic activities in the eastern part of the United States.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