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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 망명 유림의 향약 설치와 추이 = Installation of HyangYak and the Trend for the Confucian Scholars who Defected to West G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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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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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27(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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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arch 1919, when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as in full swing, Gwanjeon-hyeon HyangYak was installed near Gwanjeon-hyeon Seodaepa. There are 15 confucian scholars who defected to West Gando, which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Gwanjeon-hyeon HyangYak. These were scholars of the Hwaseo school who were closely related to Yu In-seok.
Gwanjeon-hyeon HyangYak was established HyangYakSo, BangYakSo, RiYakSo according to the size of the area under the direction of DoYakSo, which serves as the general command of HyangYak. The organization of DoYakSo was composed of Doheon 1, Buheon 1, Doyusa 1, ChanYak 5, JangUi 5, JuMu 5, ChanUi 5, ChanMu 5, SaRyae and SaJeong 3, JikWal 6, SaJeok and SaHwa 2, and JeonSin 5. This was largely similar to the Jecheon HyangYak and Gwanil Yak, which were directly or indirectly given by Yu In-seok. The confucian scholars who defected to West Gando considered Gwanjeon-hyeon HyangYak as a way to independence.
Cho Maeng-seon and others of Korean Independence Corps tried to make joined Korean Independence Corps even before the confucian scholars, who defected to the West Gando, set up Gwanjeon-hyeon HyangYak. This is because they praised the economic skills and reputation of the confucian scholars and believed that persuading the representative would absorb the capabilities of the confucian scholars. As a result, in July 1919, Park Jang-ho, Baek Sam-gyu, Song Sang-gyu, Kim Deok-shin, Kim Yoo-seong, and Jo Dae-neung joined Korean Independence Corps. In response, Yi So-eung maintained keep the justice attitude and was very critical of Korean Independence Corps and its alumni. Park Yang-seop supported Yi So-eung and tried to write an article in February 1920 to refute Baek Sam-gyu’s writing.
Shortly after the confucian scholars who defected to West Gando joined Korean Independence Corps, Conflicts arose within the Korean Independence Corps over ideological issues such as ideology and the use of era name. Dangun origin era name was used in “Warning for the compatriot in Manchuria”, but “Warning Korean compatriots” was marked as the first year of the Republic of Korea. When Korean Independence Corps was divided into Giwon and Minguk, Baek Sam-gyu and Song Sang-gyu re-installed the Gwanjeon-hyeon HyangYak under the influence of Korean Independence Corps. In an effort to continue living in exile in Gwanjeon-hyeon, two to three officials, including the governor of Gwanjeon-hyeon, sent the “The Writing For Gwanjeon Management” in April 1920 to request the protection of Gwanjeon-hyeon HyangYak.
After Hunchun Incident of 1920, the Gwanjeon-hyeon HyangYak participated in a meeting with seven organizations, including the Giwon Independence Corps, to discuss the military reunification of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in the West Gando area. The conference was held in January 1922 and after this resulted in the formation of TongGunBu. In Gwanjeon-hyeon HyangYak, Oh Sang-yong, who was a HyangYakWon when Baek Sam-gyu was in Doheon, participated as the head of the HyangYakDan, and Song Jeon-am and Oh Wan-hwa also participated. This means that when the elders who led the installation of Gwanjeon-hyeon HyangYak disappeared, the juniors who were influenced by them continued their activities.
The confucian scholars who defected to West Gando tried to preserve the Neo-Confucian tradition and maintain their exile based on it. Therefore, It showed a reactionary disposition to rejec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owever, they made partial compromises to achieve the common goal of Korea’s independence and worked to achieve it.
관전현 향약은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무렵 관전현 소아하 서대파 부근에 설치되었다. 관전현 향약을 설치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간도 망명 유림은 15명이다. 이들은 화서학파의 문인들로 유인석과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관전현 향약은 향약의 총지휘부 역할을 하는 도약소의 지휘 하에 향약소, 방약소, 리약소를 지역의 규모에 따라 설치하였다. 도약소의 직제는 도헌 1명, 부헌 1명, 도유사 1명, 찬약 5명, 장의·주무·찬의·찬무 각각 5명, 사례·사정 각각 3명, 직월 6명, 사적·사화 각각 2명, 전신 5명으로 편성되었다. 이는 유인석이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제천향약, 관일약과 대체로 유사했다. 서간도 망명 유림은 관전현 향약을 복국의 방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대한독립단의 조맹선 등은 서간도 망명 유림이 관전현 향약을 설치하기 전부터 그들을 대한독립단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유림들의 경제실력과 명망을 높이 샀으며 대표인물을 설득하면 유림계의 역량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19년 7월, 박장호·백삼규·송상규·김덕신·김유성·조대능이 대한독립단에 가입했다. 이에 이소응은 수의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대한독립단과 이에 가입한 동문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박양섭은 이소응을 지지하여 1920년 2월 백삼규의 통문을 반박하는 글을 지으려고 하기도 했다.
서간도 망명 유림이 대한독립단에 합류하고 얼마 뒤, 대한독립단 내부에서 정체와 연호 사용 등 이념적 문제로 갈등이 일어났다. 「만주거류대소동포에 경고함」에는 기원 연호를 사용했는데 「경고대한동포」에는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표기하였다. 대한독립단이 기원·민국으로 분립하자 백삼규, 송상규 등은 기원독립단의 영향력 아래에서 관전현 향약을 재설치하였다. 그리고 관전현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으로 1920년 4월 관전현 지사 외 2~3명의 관리에게 「여관전관리서」를 보내 관전현 향약의 보호를 요청했다.
경신참변 이후 관전현 향약은 기원독립단 등 7개 단체와 함께 서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의 군사통일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여하였다. 이 회의는 1922년 1월에 개최되었는데 이후 통군부 조직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관전현 향약에서는 백삼규가 도헌으로 있을 때 향약원이었던 오상용이 ‘향약단장’의 직책으로 참여하였고 송전암, 오완화라는 인물도 참여하였다. 이는 향약 설치를 주도했던 원로들이 사라지자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그 뜻을 계승하여 활동을 이어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간도 망명 유림은 관전현에서 향약을 시행하여 성리학적 전통을 지키고 이를 토대로 망명 생활을 유지해 나가려고 했다. 때문에 임시정부를 거부하는 반동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독립이라는 공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분적이나마 타협하였고 이를 위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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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0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 KCI후보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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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59 | 0.59 | 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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