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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이후 한국군의 변화와 ‘정치화’ = Changes and 'politics' of South Korean troops since the Yosu-Sunchon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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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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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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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8(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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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발생 이후 한국군, 그중에서도 육군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하며 한국군의 정치화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살펴보았다. 여순사건은 이승만정권이 극우반공체제를 완성시켜나가는데 있어서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이승만정권은 이 사건을 겪으며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는 한편 반대세력을 억눌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형성된 빨치산 뿐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이승만정권의 강력한 ‘반공화’는 물리적 기구인 군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육군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화를 추진하는 한편으로 민간 사회에 대한통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내부적으로 모병과 주둔지 이동, 반공이념의확산을 통해 안정을 꾀하는 한편으로 이승만정권의 물리적 도구로서 기능하였다. 그리하여 내부가 안정된 이후 이승만정권에 반대되는 세력들을 제거해 나가는 기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즉 이승만정권의 강력한 ‘공권력’으로서 기능하였다.
군이 강력한 체제 수호의 기구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고 친일파 청산에 대한 민족적 요구가 높아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군 핵심부를 차지했던 친일파 출신 군 수뇌부는반민법의 처벌 대상자였기 때문에 반민법과 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해 조직적으로 반발하였다. 비록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과 국방부 차관 최용덕이 광복군 출신이었고, 광복군 출신들이 일부 군에 입대했으나 당시군 수뇌부는 ‘친일파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이들에게 제헌의회 소장파의원들의 활동은 자신들에게 비수를 겨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민법의 통과와 반민특위의 활동이 강력해질수록 군 수뇌부는 그 지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특히 헌병대와 육군본부 정보국은 친일경찰이나 친일헌병 출신들이 많았다. 때문에 이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국회 프락치사건’과 ‘반민특위 해산’을 기획하거나 관여하였다.
그리고 민족분단이 법제화된 이후 통일운동을 전개하던 김구 역시 이승만 정권에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여순사건 이후 반공을 이념으로정착시키며 극우반공체제의 물리적 기구로 기능하고 있던 군과도 대립할수밖에 없다. 국회 소장파 의원들과 김구는 군의 지향과는 정반대로 활동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활동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총반격이 1949년‘6월공세’였고, ‘6월공세’ 기간에 군은 이승만 정권의 물리적 도구로서 기능했다. 그리고 군의 정치 개입의 중심에는 ‘친일파’로 비판받던 군 최고수뇌부에서부터 친일 경찰 출신의 헌병대 부사령관 전봉덕 그리고 일본군 헌병 출신의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 김창룡 등이 관련됐다. 하지만, 아직 군은 직접 정치를 주도할 만큼 확대되지 못했다. 38도선을 둘러싼 남북한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아직 충분하게 민간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할 만한 역량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군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한국전쟁은 한국군의 정치화에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북한의 침략에 맞서 ‘구국의 영웅’ 으로 자리매김 하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전쟁 이전과는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같은 한국군의 성장은 휴전 이후 정치권력과 밀착하며 종국에는 1961년 5・16쿠데타로 귀결됐다. 한국군의 ‘정치화’는 어느 날 갑자기 시 ...
Kim koo, who had been carrying out the unification movement since the government was established in the two Koreas and the division was legislated, was also a “thorn in the eye” to the military as well as the Rhee Syngman regime. This will inevitably lead to confrontation with the military, which has established anti-communist ideology since the Yosu-Sunchon Incident and served as a physical organization for the far-right anti-communist system. Young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Kim Koo acted in stark contrast to the military's sentiment. As a result, it can be assessed that the total counterattack of the Syngman Rhee regime on their activities was the "June offensive" in 1949, and that the military served as a physical tool for the Syngman Rhee regime during the "June offensive." Also at the center of the military's political intervention were top military leaders, who were criticized as " pro-Japanese group," Jun Bong-deok, a former pro-Japanese police officer and deputy commander of the military police force, and Kim Chang-Yong, chief of the intelligence bureau at the Army headquarters, a former Japanese military police officer. In particular, Army Chief of Staff Chae Byung-duk referred to President Syngman Rhee, the head of the armed forces, as a subject that South Korean soldiers should emulate in a book published in 1949. It is a symbolic representation of the military's activities and personality changes at that time. However, the military has yet to expand enough to lead direct politics. Conflicts between the two Koreas over the 38th parallel were continuing, and they have yet to reach the capacity to topple the civilian government and seize power enough. Meanwhile, the military celebrated the Korean War on June 25, 1950. The Korean War was a watershed event in the politicization of the Korean military. Above all, it has established itself as a "hero of the national salvation" against North Korea's aggression, and has grown quantitatively and qualitatively beyond the pre-war period. And the growth of the South Korean military has since been in close contact with political power, and has been able to play a leading role in the May 16 coup in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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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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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7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미등록 -> SA-CHONG(sa)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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