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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 자초의 정치 활동에 대한 재검토 - 한양 천도에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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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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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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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C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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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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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09(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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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후 한양을 수도로 정하는 과정에서 무학대사, 즉 자초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며, 실제로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논문은 1410년에 작성된 「무학대사비문」을 비롯해서 『고려사』와 『태조실록』, 『태종실록』 등 자초 당대의 자료에 근거해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그의 행적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선 초 한양 천도 과정에서 자초의 역할이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밝혔다.
자초의 활동은 조선 초에 집중되며, 고려 말에는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특기할 것은 1353년(공민왕 2) 가을부터 1356년 여름까지 약 3년 동안 원에서 유학했고, 그곳에서 지공과 나옹 혜근을 사사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고려로 돌아와서는 불교계는 물론이고 세속의 정치에서도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았고, 대선사로서 청계사 주지를 지낸 것과 고려 말년에 공양왕이 인견했다는 것 정도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활동이다. 그랬기 때문에 「무학대사비문」에서는 고려말의 행적 거의 전부를 혜근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자초가 세상에 나오기를 꺼렸다는 변명을 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초의 정치 활동은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 10월에 태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해서 왕사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태조가 자초를 왕사에 책봉한 것은 불교신자로서의 개인적인 존경심 외에 천도와 연복사탑 중창에서 자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천도 문제에서는 풍수와 관련된 자문을 필요로 했고, 그 때문에 천도후보지에 갈 때마다 동행하도록 했으며, 따로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자초의 대답은 ‘잘 모르겠다’거나, ‘나쁘지 않으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르라’는 정도였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록에 근거한다면, 자초가 한양 천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천도 논의의 정황을 살펴보아도 자초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태조가 천도를 결심한 것은 자초가 왕사가 되기 전의 일이었고, 천도 후보지인 계룡산과 무악은 각각 권중화와 하륜이 추천했고 한양은 무악에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 자초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또 한양은 풍수상으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토의 중앙에 있다는 이유로 새 수도가 되었고, 한양이 수도로 결정되는 시점에서는 정도전에 의해 풍수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따라서 태조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풍수 지식을 바탕으로 천도 문제에 자문하는 자초의 역할은 한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초에 대한 기록은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초가 활동했던 조선 초기의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에 그의 이름이 간간이 보이지만, 이후 약 200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조선 후기의 『선조실록』부터 다시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조선 초기 실록에는 없던, 자초가 한양 천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새로 나타난다. 실록뿐 아니라 조선 후기에 편찬된 『오산설림』, 『약천집』, 『연려실기술』, 『임하필기』 등에도 자초의 활동을 강조하는 내용이 실려 있지만, 이 책들은 모두 설화집 또는 야사류로서 믿을 만한 자료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초에 대한 이야기가 조선 후기에 새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따라서 조선 초 한양 천도 과정에서 자초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철저하게 후대 자료를 배제하고 그가 살아있던 시기의 당대 자료를 이용해서 수행해야 한다.
It is typically known that Buddhist master Muhak(無學大師), namely Jacho(自超), did an important role in relocating the capital to Hanyang after the founding of Joseon. However, this is groundless: it was actually fictionalized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This paper extensively analyzes his deeds from late Goryeo to early Joseon across contemporary documents including ‘Muhak’s epitaph’ written in 1410, ‘Goryoesa’, ‘Taejosillok’, ‘Taejongsillok’ and concludes that his role was not significant.
Jacho’s achievements are mainly found in early Joseon, but he was not particularly active in late Goryeo. He studied in Yuan for nearly three years(1353~1356) under Jigong(指空) and Naong Hyegeun(懶翁惠勤). After returning to Goryeo, he rarely stood out either as a Buddhist monk or a politician. Instead, it is merely found in documents that he served as Daeseonsa(大禪師) and a chief monk at Cheonggye Temple and that King Gongyang brought him in his late years. Because of this, it is presumed that Muhak’s epitaph explains his deeds mostly based on his relationship with Hyegeon, providing an excuse for his political inactivity.
Jacho began his political activities as he became Wangsa(王師) by Taejo in 1392, right after the founding of Joseon. Taejo hired him not only for religious reasons but mainly because he needed geomantic advice for relocating the capital city. Whenever Taejo showed him around the candidate locations and asked for his opinion, Jacho would answer, ‘Well’, or ‘Not bad, but please listen to many other people as well’, far from being aggressive. Therefore, based on the records, it is hard to conclude that Jacho’s role was significant in moving the capital.
It is also true in terms of the whole context of the discussion on the movement. First, it was even before Jacho became Wangsa that Taejo decided to move the capital. Second, its two candidates Gyeryrongsan(鷄龍山) and Muak(毋岳) were suggested by Gwon Joonghwa and Ha Ryun, respectively. It was only a coincidence that Hanyang became another candidate on the way from Muak. Accordingly, there was no room for Jacho’s interference here. Moreover, because of its central location in the territory, Hanyang was determined as the new capital despite its geomantic insufficiency. At that time, a doubt against the plausibility of geomantic theory was raised by Jeong Dojeon. Overall, Jacho’s influence on the capital relocation based on his relationship with Taejo and geomantic knowledge had to be limited.
There is one notable point about the records on Jacho. There is a 200-year-gap between his name showing up in ‘Taejosillok’ and ‘Taejongsillok’ and later again in ‘Seonjosillok’ in late Joseon. The latter records that Jacho did an important role in the capital relocation that was missing in the earlier documents. Other than Sillok, there are other documents edited in late Joseon that emphasize Jacho’s influence, including ‘Osanseollim(五山說林)’, ‘Yakcheonjip(藥泉集)’, ‘Yeolleosilghisul(燃藜室記述)’, and ‘Imhapilghi(林下筆記)’, but they lack credibility for being collections of folktales or anecdotes. This strongly suggests a possibility that the records overestimating Jacho’s role were invented in late Joseon. Therefore, studies on Jacho’s role in the capital relocation in early Joseon should be implemented based on the contemporary records in his era, thoroughly excluding the texts published in later years.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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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20-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2019-12-01 | 평가 | 등재후보 탈락 (계속평가) | |
2018-12-01 | 평가 |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 KCI후보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10-02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서울학연구 -> 서울학연구 | KCI등재 |
200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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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3 | 0.63 | 0.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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