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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지방 유림의 중국 이주 과정과 귀향의 동인 고찰 서천 조정규의 봉천 덕흥보 사례를 중심으로 = A Study on a Local Korean Confucian Scholar’s Process of Migration to Deokheungbo (德兴堡), Fengtian, and the Driving Force Behind His Return in the 1910’s Focusing on the Case of Seocheon Jo Jeonggyu
저자
한길로 (吉林大學)
발행기관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Seoul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of Humanities)
학술지명
인문논총(人文論叢)(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Journal of Humanites )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55-180(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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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man (咸安) scholar Seocheon Jo Jeonggyu (趙貞奎) planned to move away from the colonial reality, and in 1913 he crossed the Amnok River to Beijing to check up on the actual situation of the region. He discovered the disastrous lives of Korean immigrants living in Seogando, China.
Accordingly, on his way back, he met Lee Seung-hee (李承熙), who was in Andong (安東) at the time, and made a detailed plan. After returning to his hometown, he hurried to prepare for immigration by selling his property, and in August 1914, he arrived in Fengtian (奉天), China, and began to build a base for the Korean community 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His participation was of great help to Lee Seung-hee, who was leading it, and eventually h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immigration to Bongcheon. They expected a stable life by purchasing the land of Deokheungbo (德兴堡), which was 2/3 the size of Yeouido in Seoul.
However, various disasters continued and unfortunately the community building at Deokhungbo ended. Later, he tried to immigrate again to the Qufu (曲阜) of Shandong Province, Confucius’ hometown, but he also failed; in 1916, Lee Seung-hee, his close friend and senior, died. In 1917, the Confucius Branch in Korea was also established. In 1918, when he returned to his hometown due to illness, his immigrant life also ended. As a result, his trip to China can be judged as a series of failures and frustrations.
However, his actions also meant meaningful Confucian resistance in the modern era, which included social responsibility and brotherly affection of the intellectual. Therefore, Deokheungbo is a meaningful historical site that retains the sadness of modern Confucian scholars and Korean immigrants.
In addition, his return contains the symbolism of the transition of the center of the Confucius movement from China to Korea.
본고는 1910년대 중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려 했지만 결국 귀환을 택해야만 했던 당대 유림의 실정과 내면을 살피는 논문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함안 유림 서천 조정규라는 인물을 통해 현지에서 그들이 마주했던 현실과 난간들을 조명하면서 ‘귀환의 동인’에 주목하려 한다. 강제병합 이후 ‘피세와 피지’를 염두했던 조정규는 1913년 압록강을 건너 북경까지 유람하며 당지의 실황을 확인한다. 그곳에서 한인 이주민들의 처참한 생활을 목도한 그는, 귀국길에 당시 안동에 머물고 있던 이승희를 만나구체적인 계획을 타진하였다. 이듬해인 1914년 8월경, 그는 마침내 중국 봉천에 당도하여 한인 유교공동체와 독립운동 근거지 구축에 착수했다. 그들은 요중현(辽中縣) 덕흥보(德興堡)의 황무지 56만여 평(현 여의도의 2/3 크기)을 매입하여 성공적인 정착을 기대했지만, 대내·외적 재난이 겹치며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곡부로 발길을 돌려 그곳으로의 이주를 타진했지만 그 역시 실패하였고 1916년 벗이자 동지였던 이승희역시 죽음을 맞이하며 공교운동은 크게 위축된다. 이 사이 입적 강요와 비적들의 횡포, 일제의 회유 등으로 유림들의 재이주와 귀환이 이어지는 가운데 1917년에는 국내 공교지회도 설립도 추진되었다. 국내 지회 설립을 지원한 그는 1918년 ‘귀환’하며 약 5년간의재중 이민자의 삶도 종결된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국난을 해결하는데 일조하고, 또 유학의 인문정신으로 약육강식의 시대와 맞서 투쟁하려던 근대 유림의 ‘유교적 저항’을 보여주는 궤적이었다. 더불어 이민자들의 난간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함께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동포애와 이주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의식’ 실천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또한 그의 귀국은 공교운동의 방향이 국내로 전환됨을 상징하는 행보로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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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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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5-01-07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Seoul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of Humanities -> Institute of Humanit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 KCI등재 |
2015-01-06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Journal of Humanites -> Journal of Humanit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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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71 | 0.71 | 0.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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