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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개성상인 崔善益의 언론・문화사업 = Newspaper Company Management and Cultural Business Management by Choi Sun-ik, a Merchant in Gaeseong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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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성 (건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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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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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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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17(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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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 case study of Choi Sun-ik, an entrepreneur from Gaeseong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e changed from being a ginseng capitalist in Gaeseong to being a modern entrepreneur, and gradually moved his activities from his hometown of Gaeseong to Seoul while investing in newspapers and cultural businesses.
Choi Sun-ik, the son of a wealthy person in Gaeseong, suddenly became a millionaire when he inherited a huge fortune at the age of 16. His father Choi Seong-gu's foundation was engaged in traditional Gaeseong industries such as ginseng cultivation and a loan business.
However, in the 1920s, he invested in electronics, rubber, and weaving in the form of a joint stock company in connection with the wealthy and youthful elites of Gaeseong. He actively engaged in entrepreneurial activities, such as directly operating Gaeseong Trading Co., Ltd. In the 1930s, he expanded his operations to Incheon and Seoul, also operating trade, finance and liquor companies.
He was described by the media as a “young cultural entrepreneur” and he was very active in the 1920s and 1930s. This is because,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he jointly took over the publishing rights of the Chosun Ilbo with Shin Seok-woo in 1925, and took over the publishing rights of the Chosun JoongAng Ilbo in 1932. Also, in 1925, he invited a professional operator and childcare teacher and opened the Susong-dong Kindergarten equipped with the latest facilities.
Choi Sun-ik's human network was formed of three elements.
First, he entered Seoul Choongang High School without going to high school in Gaeseong ; second, he was able to communicate with traditional aristocrats and new intellectuals while living in Bukchon, Seoul ; Third, he was in close contact with Gaeseong people who studied in Seoul or Japan. As a result, he made connections with influential figures of the time such as Kim Seong-su, Ahn Jae-hong, Song Jin-woo, and Yeo Woon-hyeong, as well as Kim Dong-seong, Lee Seon-geun, Gong Seong-hak, Ko Han-seung, Jin Jang-seop, Ma Hae-song, Kim Young-bo, etc. Using those connections, he was able to advance into newspapers and cultural businesses.
However, at that time, newspaper management suffered from severe financial difficulties, frequent business suspensions, and increasing debt. In the process, Choi Sun-ik also suffered huge personal losses as he gave up the management of the newspaper and the operation of the Susong-dong Kindergarten. It is clear that newspapers and cultural business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required managers with a clear will rather than a clear investment profit.
After leaving the Chosun JoongAng Ilbo, Choi Sun-ik lived as an entrepreneur and did not engage in cultural business. After liberation on August 15th, he again stood at the center of social controversy as an executive of Kyungsung Electric Co., Ltd. Research on this episode of his life is a task for the future.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개성 출신의 실업가 崔善益(夢草, 1904~?)을 통해서, 개성의 인삼 자본가가 근대 기업가로 변신하고, 다시 언론・문화사업에 투신하면서, 활동 무대를 고향 개성에서 중앙의 경성으로 서서히 이동시킨 실증적 사례 연구이다. 최선익은 개성 갑부의 아들로서, 불과 16세의 나이에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벼락부자였다. 그의 경제적 기반은 인삼 재배업, 농지경영, 市邊 등 개성의 전통적 산업이었으나, 최선익은 1920년대 개성의 부호와 신진 엘리트들과 연계하여 주식회사 형태의 전기・고무・직조업 등에 투자하고, 직접 개성상사주식회사를 운영하는 등 근대적 기업활동을활발히 전개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사업장을 인천과 경성으로 확대하면서, 무역업・매매업・금융업 및 주류 회사도 운영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언론은 최선익을 ‘청년문화사업가’로 규정하고 그의 행보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는 그가 3.1운동 이후인 1924년 신석우가 조선일보 경영에 나설 때 공동투자했고, 1932년에는 조선중앙일보의 판권을 인수하여 여운형을 사장으로 자신은 부사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또한1920년대 당시의 최고 전문 운영자와 보육교사를 초빙하고 최신의 설비를 갖춘 수송동유치원을 개원 운영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최선익이 청년 문화사업가로서 주목받으며 활동할 수 있었던 기반은 첫째, 그가 고향 개성이 아닌 경성의 중앙학교[중앙고보] 로 진학하여 폭넓은 학연을 맺었다는 점, 둘째, 경성 북촌 일대에서 생활하면서 전통양반 및 신지식인층과 교유하고 인연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 셋째 개성 출신으로경성이나 일본에서 유학한 인사들과 긴밀히 교유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최선익은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여운형 등 당대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김동성, 이선근, 공성학, 고한승, 진장섭, 마해송, 김영보 등 개성 출신 인사들과의 인연을 맺고 있었고, 이것이 결국 그가 언론・문화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인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인적・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최선익은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에 투자하고, 수송동유치원을 운영했으며, 각종 사회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청년 문화사업가로서의 10여 년은 결코 성공적이지 않았다. 당시 언론사 경영은 잦은 정간과 폐간 등으로 각종 채무를 증가시켜 자금난에 부딪쳤고, 출자금 증자에 따른 경영권 분쟁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선익 역시 언론사 경영과 수송동유치원 운영을 접었고,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즉 일제강점기 언론・ 문화사업은 투자 이익을 기대하기보다는 손실의 위험이 더 큰 사업이었고, 언론 문화사업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경영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최선익의활동은 개성의 전통적 산업에 기반을 둔 자본가가 근대 기업 및 언론문화 자본으로 전환한 구체적인 실증적 연구로서 주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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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1.28 | 1.28 | 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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