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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초기 한미관계와 선교사의 역할 - 알렌과 헐버트를 중심으로 = Early Korean-American Relations and the Role of American Missionaries : With Particular Attention to Horace Allen and Homer Hul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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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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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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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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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4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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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초기 한미관계와 선교사의 역할 - 알렌과 헐버트를 중심으로개신교가 19세기 후반에 은자의 나라에 들어 온 시기는 제국주의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다. 또한 한국 주변의 세 강대국인 중국, 러시아, 일본이 서로 세력 다툼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각국은 한국을 통제하에 둠으로써 상대 국가들이 군사 기지를 건설하는 일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세기말의 일본 침공으로 연결되었다. 중국과 달리 한국의 제국주의 팽창은 서구열강에 의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럽 제국주의는 기독교 왕국의 팽창에 기여했지만 일면에서는 기독교 선교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것이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1884년 6월 일본에 파송된 감리교 선교사인 로버트 맥클레이(Robert S. Maclay) 부부가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그 여행을 통해 선교를 할 수 있다는 왕실의 허락을 받았다. 전면적인 허가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의미 있는 첫 발걸음이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1884년 9월 20일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이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전면적 시작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북미 장로교 선교회에서 의료 선교사로 파송 되었다. 그의 파송은 1882년 미국 정부가 서울에 설치한 공사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882년의 한미 수호 조약으로 인해 선교의 문이 개방된 이후로, 미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알렌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선교지를 전임하여, 1884년에 “은둔의 나라”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입국하였고, 나중에는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885년에는 북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에 속한 아펜젤러와 윌리엄 스크랜톤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는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국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1886년에 내한하여, 교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의 근대 청년 교육 운동에 선구적으로 기여하였고 독립운동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 이후에 다른 선교 기관들도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하였으며, 1889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선교부가, 1892년에 미 남장로교 선교부가, 1896년에 미 남감리교 선교부가,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가 각기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공식적인 설교를 할 수 없었지만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는 일은 한국 정부의 허락을 받았다. 특히 알렌과 헐버트는 개항 이후 초기 한미관계와 한국의 선교역사에서 개척자의 역할을 어려운 상황에서 잘 감당해 낸 선구자들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그들이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에서의 선교발전과 한미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그들이 기여한 공헌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더보기Early Korean-American Relations and the Role of American Missionaries : With Particular Attention to Horace Allen and Homer Hulbert When Protestant Christianity entered the Hermit Kingdom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it was a time when imperialism was developing. Also, it was a time when Korea’s three large neighbors, China, Russia, and Japan, were struggling with each other for power. Each wanted to control Korea and to prevent the others from putting military bases there. This political situation led to the Japanese invasion at the turn of the century. European imperialism helped to spread Christendom and, in one sense, hindered the spread of Christianity. The indegenous Christians, except in Korea, were branded as denationalised people. This was one of the reasons why Christianity did not make much headway in Asia. In June 1884, the Rev. and Mrs. Robert S. Maclay, Methodist missionaries to Japan, made a trip to Korea to investigate the possibility of a mission, and during the trip obtained royal permission to establish a mission. Although this was not full permission, including preaching of the gospel, it was a meaningful first step. Another important event was Horace N. Allen’s arrival on September 20, 1884, signaling a full-scale opening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He was sent by the Board of the American Northern Presbyterian mission as a medical missionary. His appointment was closely related to the diplomatic mission in Seoul established by the U.S. government in 1882. Since the treaty between Korea and the United States in 1882 opened a door for missionary work. Horace Allen of the Northern Presbyterian Board was transferred from China to Korea and thus became the first Protestant missionary to the “Hermit Nation” in 1884 and then became a diplomat of the United States to Korea. In 1885, Horace Underwood of the Northern Presbyterian Board, and Henry Appenzeller and William Scrant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Board, arrived on the field. Homer Hulbert arrived in 1886 as a teacher of Yukyeong Academy, the first modern national school and then he did very crucial role in educating many national leaders and in independence movement. Also, at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other foreign mission agencies began sending their missionaries to Korea: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in 1889, the Southern Presbyterian in 1892, the Southern Methodist in 1896, and the Canadian Presbyterian in 1898. These men were not allowed to preach, but were permitted by the Korean government to open hospitals and schools. Particularly, Allen and Hulbert were the pioneers in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the U.S. as well as various early missionary works in Korea. This paper seeks to examine their contributions to the early Korean-American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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