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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착과 한국 인식 = Settlement of French Missionaries during the Enlightenment Period in Korea and Their Perception of the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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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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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heir return to Korea in 1876, French missionaries, in efforts to reconstruct a Christian community, had engaged in community activities such as cultivating catechist, offering free funeral services and running orphanage, nursing home, pharmacy and even schools. Their outreach efforts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interactions between the Catholic Church and local communities and contributed to increasing the number of Catholics in Korea. In the meantime, the French missionaries were able to settle down in the country.
They carried out their missionary work based on the Korea-France Treaty’s provisions for consular jurisdiction and the protection of foreigners and with support from the French Minister to Korea. As a result, they came to have considerable influence and better status especially in rural communities. Furthermore, the exoneration of Nam Jong-sang and Hong Bong-ju in January 1895 and the audience of Bishop Mutel with King Gojong in August of the same year constituted important backgrounds for missionaries to settle down in a local community.
Meanwhile, those missionaries who settled in Korea during its Enlightenment Period treated Korean people and their culture with a Western sense of cultural superiority and recognized the Japanese rule of Korea based on the perception that the country was politically corrupt and backward, ignoring the issue of Korean independence. The missionaries took a pro-regime position in order to have freedom of religion guaranteed, although they were well aware of the difficulties of the people who had suffered exploitation and had a understanding of what Japan’s invasion did mean. Consequently, they supported the Joseon Dynasty’s regime while it was in place and accepted the Japanese rule after the forced Eulsa Treaty concluded in 1905.
In conclusion, the freedom of religion and doubts about Korea’s ability to achieve independence constituted a main reason why the French missionaries ignored Korea’s national issues during the Enlightenment Period; however, the way that they looked at Korean problems as Frenchmen can be said to have underlain such perceptions.
이 논문은 1876년부터 1910년 사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 정착과 한국에 대한 인식 문제를 살펴본 글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재입국한 1876년 이후 신자공동체를 재건하는 한편, 전교회장을 양성하고, 고아원, 양로원, 시약소, 무료 장례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학교도 운영하였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 천주교의 인상을 좋게 하고 외교인들을 감화시켜 신자수를 증가시켰고, 천주교가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선교사들의 정착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선교사들은 조불조약의 ‘영사재판권, 외국인 보호’ 조항과 프랑스 공사의 후원을 토대로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이들은 양대인으로 호칭될 정도로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이 커졌고, 이러한 선교사들의지위 향상은 교세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1895년 1월에 있었던 남종삼과 홍봉주의 신원 조치와 8월에있었던 뮈텔(Mutel) 주교의 고종 알현도 선교에 영향을 미쳤다. 역적으로 취급되던 신자들이 신원되고, 사교라고 탄압받던 천주교의 책임자가 국왕을 만났다는 것은 선교사들이 지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한편 개화기 한국 사회에 정착했던 선교사들은 서구문화 우월의식에 입각하여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평가했고, 한국이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낙후되었다는 인식 아래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외면했다. 선교사들은 착취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일제의 침략이 의미하는 바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체제옹호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가 유지될 때에는 왕조 체제를 옹호했고, 1905년 이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결국 종교의 자유, 한국의 독립 능력에 대한 회의가, 개화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족 문제를 외면한이유지만,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는 프랑스인으로서 한국 문제를 바라보는 타자의 입장이 깔려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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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3-06-12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Oriental Studies | KCI등재 |
2013-03-13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동양학연구소 -> 동양학연구원영문명 : Dankook University Institute of Oriental Studies -> Academy of Asian Studies, Dankook University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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