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와 잉글랜드 휴머니즘 = Henry VIII and Renaissance Humanism in England
저자
허구생 (서강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15-144(30쪽)
제공처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잉글랜드 역사상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영향 아래성장하고 나라를 통치한 첫 번째 군주이다. 그는 당대 일급의 휴머니스트 교사들로부터 라틴어, 수사학, 역사학, 그리고 음악을 배웠으며, 불어, 이탈리어 등 여러 외국어를 익혔다. 그는 1509년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그의 주변에 휴머니스트 지식인들이 여럿이 있었으며, 그들은 새로운 학문에서 얻은 지혜를 언제든지 왕에게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잉글랜드의 휴머니스트들은 ‘위로부터의 사회 개혁’을생각하고 있었고, 새 왕을 자신들의 희망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헨리 8세는 휴머니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한 르네상스 군주였을까? 대답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는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자로서 전쟁과 평화정책을 번갈아 펼쳤다. 휴머니스트들은 유럽을 하나의 덕스러운 기독교공동체로 가꾸어 갈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전쟁은 그들의 대안이 아니었다. 특히 그가 통치 말기에 일으킨 전쟁은 커다란 명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아까운 국가의 자원을 무의미하게 낭비한 사건으로 남았을 뿐이다.
후사를 얻어 국가의 장래를 탄탄히 하고자 하는 그의 욕심은 첫 번째 왕비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국왕의 이혼 문제는결국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종교개혁 아닌 교회의 개혁을 통해서 덕스러운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들을 실망시켰고, 왕의 곁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생각하지 못했던 긍정적인 영향을 잉글랜드 역사에미쳤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에는 덕성의 함양을 중시했던 제1세대 휴머니스트들과 달리 실용적인 사고를 가진 다음 세대 휴머니스트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의 이혼, 수도원 해체, 중도적인 교리 수용 등 종교개혁의 모든 절차를 의회입법을 통해서 처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의회의 소집 주기가 단축되고 회기가 연장되는 등 규칙성이 강화되었다. 또한 의회가 다루는 의제의 정치적, 사회적 중요성이 크게 높아졌다. 특히 1536년의 빈민법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최종적으로 반포된 법 그 자체보다는 최초 의회에 상정되었던 법안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법안은, 예컨대, 노동능력이 있으나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른바 ‘비자발적 실업 빈민’을 위하여 국가가 공공고용 사업을 추진할 것을 규정하고, 누진적 소득세를 통해 빈민구제 재원을 마련할것을 규정하였는데, 이는 근대적 복지정책이 나아갈 방향을 선도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잉글랜드 의회는 국가의 가장 중추적인 기관으로 성장하였으며, ‘의회 속의 국왕’이라는 최고주권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1539년 처음 출판된 영어판 성경은 잉글랜드 르네상스 문학을 꽃피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성취를 가져온 장본인은 국왕이 아니라 토머스 울지와 토머스 크롬웰을 비롯한 그의 신료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중용한 사람이 헨리 8세이며, 그들의 정책이 수용된 것은 헨리의 의지와 동의가 있어야 가능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절반의 공적은 헨리의 몫으로 돌려주는 것이 맞다.
Henry VIII of England was the first monarch in English history to grow up and rule a country under the influence of Renaissance humanism. He was taught Latin, rhetoric, history, and music by the first-rate humanist teachers of his time, and learned several foreign languages, including French and Italian.
He ascended the throne in 1509 at the age of 19. Fortunately for him, he had a number of humanist intellectuals around him, who were always ready to provide the king with their wisdom from the new learning. England's humanists were thinking of 'social reform from above' and, therefore, the new king became their hope.
Then, was Henry VIII a Renaissance monarch who widely accepted humanism? The answer is not so easy. As the final decision maker of foreign policy, he alternated between war and peace policies. Humanists had hopes of transforming Europe into a virtuous Christian community, so wars were not their alternative. In particular, the war he raised at the end of his reign not only did not have a great justification, but also remained as an event meaninglessly wasting precious national resources. His desire to secure an heir and secure the country's future led to his decision to divorce his first queen, Catherine of Aragon. The king's divorce issue eventually led to the Reformation in England. The Reformation itself disappointed most humanists who tried to create a virtuous Christian community through church ‘reform’, not ‘the Reformation’, and made them leave the king.
However, the Reformation had several unexpected positive impacts on English history. And in that background, unlike the first-generation humanists who valued the cultivation of inner virtue, there was a next-generation humanist group with pragmatic thinking. They had the idea of reforming society through laws and institutions. As all procedures of the Reformation, such as the king's divorce, the dissolution of monasteries, and the acceptance of moderate ‘via media’ doctrines, were handled through parliamentary legislation, the regularity of parliament was strengthened, such as shortening the convocation cycle of the parliament and extending its sessions. In addition, the political and social importance of the agenda addressed by the parliament has increased significantly. The English parliament grew to be the most pivotal institution of the state, and the concept of supreme sovereignty, ‘the king-in-parliament’, was born. And the English version of the Bible, first published in 1539, became a source of nourishment for English Renaissance literature to come in the reign of Elizabeth I.
Some have argued that it was not the king who was responsible for these achievements, but his subjects, including Thomas Wolsey and Thomas Cromwell. However, given the fact that Henry VIII was the one who employed them, and that their polices were accepted only with Henry's will and consent, it is right to give a half of the credit to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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