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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 禁酒令과 減膳의 정치적 활용 = The Political application of the Prohibition law and the Temperance on King’s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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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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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hibition law(Geumju) and the temperance on King’s table(Gamson) was the one of the efficient way for presenting in awe of heaven and nature. The actions of temperance on King’s table was initiated from royal rituals in early period, and was shifted to show the awe and respect to heaven and nature.
In the ideological concept of ancient and medieval time, the Sage king was judged by heaven and only a King could get the Mandate of heaven was regarded as the Sage king. It did not matter how the actual result of the restriction as prohibition and the temperance on table but these were the great manners of Sage king.
On the situation of famine, King reduced his dishes meant king shared pain with his people and it could be the symbol of Confucian sage king.
Simultaneously, people were expected to keep the law of prohibition. It was the practical actions during the period of famine against disaster.
As the neo-confucian philosophy was emphasized, the attitude of linking the natural disasters with the king's politics became stronger.
In the end, the attitude of separating the roles of the people and the king was emphasized in the late period as a result of the political intention to show that the people and the king were closely bound together. The political intent to suggest that there is a people at the base of power as an effective countermeasure against bureaucrats who were powerful political rivals of the king is confirmed by this.
The two acts of the Prohibition law and the Temperance of King’s table were a practical and ideological contradictory solution to the common cause of meteorological upheaval. In other words, the people were the ones who practiced realistic solutions, and the king emphasized that ideological and symbolic acts are expected rather than practical help. Therefore, this week was a way of expressing practical actions and ideological actions to overcome the national crisis, and was a response of the people and the king to the national disaster.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감선과 금주는 조선 시대 내내 필요에 의해 실행과 철폐를 거듭하였다. 왕의 밥상에 제한을 가하는 감선은 처음에는 왕실의 제사에서부터 시작되어 고위 관료들의 졸거에 대한 애도의 표시 등으로 시행되다가 점차적으로 가뭄이나 추위 등과 같이 자연의 재해에 대한 공구수성의 표현으로 비중을 옮기게 되었다.
왕의 善政과 失政은 하늘이 판단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고대, 중세적 사고와 성리학적 군주의 표상이 겹쳐지면서 그 실효와는 별개로 감선은 바람직한 聖君의 자세로 이해되었다. 국가의 근간산업인 농사에 절대적 조건이었던 기상은 마치 인간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했으며, 자연재해에 수반된 기근의 상황에서 왕의 감선은 곧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같은 상황에서 백성들에게는 禁酒라는 제재가 가해졌다. 물론 금주령은 왕과 백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으나, 실제적으로 왕의 밥상에서 술은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술은 왕의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품목이었기 때문에 간혹 왕들이 백성과 함께 금주의 뜻을 비추는 경우에도 관료들의 반대로 왕실에서의 음주는 이어졌다. 그러다가 이따금 백성들에게 내린 금주령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해 모범을 보이기 위한 행동으로 왕의 금주가 실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백성들에게도 藥酒 또는 축하라는 명목 아래에서의 음주는 금주령 하에서도 용인되었고 아울러 사신 접대, 연향 등의 國用, 그리고 관리들의 음주는 허가되는 상황에서 백성들에 대한 금주령 자체가 엄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금주의 목적은 춘궁기의 곡식 저축이 가장 큰 것이었고, 때로는 과도한 음주로 禮를 어그러뜨리는 사례들이 발생하면서 禮道를 가르치기 위한 금주령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금주령은 여러 이유로 엄격히 지켜지지는 못했고 강력히 규제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재해를 맞았을 때 금주령이 먼저 내려지고 그 실효에 따라 왕도 차후 금주령에 동참하거나 감선의 해법을 동원하였다. 따라서 금주령과 감선은 초기에는 그 대상을 나누어 적용되는 것이었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금주령은 왕에게도 적용되었다. 자연재해가 왕의 失政에 대한 경고라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았지만 하늘에 대한 왕의 공구수성은 여전히 형식적인 것이나마 남아 있었다. 오히려 그러한 형식적 행위는 그 수위를 높여서 금주령은 왕실과 국용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아울러 감선의 횟수도 늘어났다. 성리학적 정치철학이 강조될수록 과학적으로 연관관계가 없는 자연재해와 왕의 정치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태도가 더욱 강해졌으며 그러한 왕의 의지를 보여주는 태도가 바로 감선과 금주였던 것이다. 그래서 금주령에 대한 위반은 엄격한 법 집행으로 이루어졌고, 감선이 자연재해를 그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왕이라는 책무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내외에 알리기 위한 의도적 태도로 더욱 빈번하고 강력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결국 백성과 왕의 역할을 분리시켰던 초기의 금주령과 감선의 태도는 백성과 왕이 긴밀하게 묶여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의도가 작용하면서 후기로 갈수록 강조되었 ...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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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9-12-31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forklife -> 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folklife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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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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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3 | 0.63 | 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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