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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 金敎三의 민족운동과 광복 후 정치활동 -‘父子ㆍ夫婦ㆍ丈壻 독립운동가’였음에 주목하며- = National Movement to Political Activities by Kim Gyo-sam nicknamed “Minsan” Which Meant the People’s Mountain -With a Special Attention to His Relations with Three Other Independence Fighters as ‘Father(-in-law) and Son’ or as ‘Husband and Wife’-
저자
김영범 (대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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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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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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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3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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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is article, the author tries to restore and illuminate the life of Kim Gyo-sam, a Korean independence fighter born in 1912. Thus the related facts are broadly traced and closely examined.
Born as the second son of Kim Jeong-mook who would be a leader of independence movement abroad in 1920s, Kim Gyo-sam also entered the camp of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in middleland China. He acted continuously and energetically in various fields under the pseudonym “Yang Min-san,” to build glaring achievements. The organizations or associations that he entered, or participated in, or served, or devoted himself to as a cadreman between 1930s and the early 1940s were as follows: the Military and Political Academy of Eui’yeoldan for Korean Revolution at Nanjing,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based also at Nanjing, the Korean Volunteer Corps founded at Hankow in 1938, the Armed Propaganda Unit of the Hwabei Branch of the Korean Volunteer Corps at Taihang mountains in 1941, the Koreans’ Independence Alliance in Hwabei(North China) in Yenan after 1942. Especially, it must be attended to and noted that he married Chang Su-yeon about 1937, who was a daughter of Chang Gun-Sang, a leader in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with her promising to be his lifelong comrade and companion.
After the Liberation Day of the year 1945, he entered north Korea and active on the political stage for more than ten years, making efforts to build and maintain the New Chosun(Korea), under the alias of "Kim Min-san." Nonetheless, he met after all a ill luck of being purged by Kim Il-sung in 1958. After that incident, the person and his name has been forgotten and buried on the field of public memory in both the South and North Korea. So to speak, a critical mind towards that situation drives and pulls this article.
It might be said that Kim Gyo-sam's life course was to match exactly with the path of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history, which suffered successively from colonization, national division, and fratricidal war throughout the 20th century. In that sense, I would to conclude that the former was a typical case of hardship struggle and tragic end of the left-wing nationalists who tried to devote themselves to solving national problems.
이 글에서 저자는 경북 선산 출신의 1912년생 민족운동가 김교삼의 전 생애를 복원, 조명해보고자 관련 사실들을 하나하나 검출하면서 추적, 고찰한다. 1920년대의 중견 독립운동가 김정묵의 차남인 김교삼은 1932년에 재중국 항일독립운동 진영에 투신하여 계속 활동해가면서 적잖은 공적을 쌓았다. 8·15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간 그는 ‘김민산’이라는 이름으로 10여 년 간 정치무대에서 활동하다 숙청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 후로 그의 존재와 이름은 남·북 양쪽에서 잊히고 묻혀왔다.
어려서 부친의 손에 이끌려 중국 북경으로 망명 이주하였고 초·중등 교육 이수 후 화북대학을 다닌 김교삼은 1932년 남경으로 가서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였다. 제1기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2·3기의 교관으로 봉직하면서 ‘양민산’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한 그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과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으로 경력과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937년경에 독립운동가 장건상의 딸 장수원과 결혼하고 ‘장수연’이라는 이름의 평생 동지요 반려로 삼았다. 1941년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 때 동행해간 그는 태항산 일대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조선의용대 무장선전대의 간부요원으로 활동했다. 김두봉의 비서가 되어 연안으로 옮겨가서도 화북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과 조선청년혁명학교 교관으로 일하다 조국광복을 맞았다. 독립동맹 간부진의 일원으로 봉천을 거쳐 북한에 가장 먼저 들어간 그는 조선신민당 고위 간부를 거쳐 북한정권 성립 후의 당·정 관계 요직도 수차 역임하며 신국가 건설과 유지에 진력하였다. 그러다 김일성 유일지도체제 확립을 위해 1958년에 불어 닥친 정치적 숙청의 회오리를 피하지 못하고 제물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김교삼의 생애는 식민지화와 남북분단 및 동족전쟁을 연이어 겪어간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경로와 그대로 맞물려 이어진 것이었고, 그 속에서 고투해간 좌익 민족주의자들의 비운을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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