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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자와 조선 - 일제시기 大池忠助의 지역성과 ‘식민자’로서의 위상
저자
발행기관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Center for Korean Studies Pusan National University)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71-316(46쪽)
제공처
소장기관
‘식민자’ 또는 ‘풀뿌리 식민자’로 평가되는 재조일본인 오이케 츄스케는 1856년 쓰시마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인 1875년 부산으로 건너와 대일무역에 종사하면서 친형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무역 및 고리대업은 물론이고 일제의 조선 침탈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며 조선의 출입구인 부산과 오이케여관을 통해 일본군부와 관계를 맺고 토지구매, 군수물자조달을 통해 자본을 확장했다. 개인사업과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오이케는 강고한 인적네트워크도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기반과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확대해 나갔다. 그가 맺은 인적네트워크는 제국주의 일본의 핵심적인 인사인 관료와 군인은 물론, 일본 본국의 재벌 및 경제인, 그리고 조선 또는 부산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 등이었다.
부산에서 쌓은 인적·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오이케는 경제활동과 공직활동을 통해 ‘부산의 오이케’에서 ‘조선의 오이케’로 나아갔다. 우선 그는 개인경영의 11개 부문을 토대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동시에 부산 및 조선의 각종 회사와 조합의 설립과 경영에 뛰어들어 1929년 사망 때까지 부산 및 조선재계의 원로로서 활동하였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공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업회의소, 부협의회(도평의회), 학교조합 3단체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면서 향리인 쓰시마에 입후보하여 당당히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이케는 ‘부산의 오이케’를 넘어 ‘조선의 오이케’로 표상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공한 식민자로 위치 지워졌다. 하지만 식민지에서의 성장과 제국주의 내의 위상은 식민지 조선이라고 하는 공간, 특히 부산이라는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여기서 본국 일본인과 식민지 일본인 간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그 독특한 위치도 드러난다.
Considered as a "colonizer" or "Grassroots colonizer," Oike Chusuke, a Japanese colonial settler, was born in Tsushima in 1856 and moved to Busan in 1875 when he became 20. In Busan, he started to build his foundation by the assistance of his elder brother, engaging in trade with Japan. Like most Japanese people that made growth in Chosun, he conformed to the situations of the times including Japan"s invasion of Chosun as well as smuggling and loan sharking and accumulated capital by forming relations with the Japanese military through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and Oike Ryokan, purchasing land, and delivering war supplies. He established a solid human network based on his personal business and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further solidifying and expanding his foundation and position. His human network encompassed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soldiers, who were the core figures of imperial Japan, the financial cliques and businessmen of Japan, and Japanese and Chosun people residing in Chosun or Busan.
Based on his human and material foundation, he evolved from "Oike of Busan" to "Oike of Chosun" through economic activities and public duties. He first managed his economic activities based on his 11 personal establishments and then got involved in the foundation and management of all kinds of companies and associations in Busan and Chosun around the 1900s. He served the financial community of Busan and Chosun as an elder until 1929 when he passed away. He was also an active, central figure in the chamber of commerce(商業會議所), Pu-council(府協議會), and school corporation(學校組合), which were part of "public duties" during the Japanese rule. His activities of "public duties," in fact, expanded to Japan beyond Busan. In 1914, the Japanese colonial settlers lost their autonomous body after the abolition of the Georyumindanje(居留民團制). Once feeling a need for political activities in Japan in order to promote their stability and expand their foundation in colonized Chosun, they started to advance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Joining the flow, Oike was elected in his hometown Tsushima and finally advanced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which is why he was represented as "Oike of Chosun" beyond "Oike of Busan" and position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 successful colonizers in Chosun. However, his growth in the colonized country and his status within imperial Japan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space of Chosun or more particularly Busan. Here, the differences between Japanese people from Japan and those from a colonized country become obvious along with their unique position. They faced their contradictory position between "colonizers" and "residents of colonized land" in reality through the Japanese rule, which is why the contradictions of imperialism also took place within the 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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