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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星齋 柳台衡의 현실인식과 개혁론 = Samseongjae(三星齋) Ryu Tae‐hyeong’s (柳台衡) Perception of Reality and Reform Theory
저자
이욱 (순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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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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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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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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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147(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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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tudy examined the philosophy of Ryu Tae‐hyeong, a scholar and bureaucrat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its characteristics. Ryu was a member of the Sisinae (始川) clan of Ryu’s family from Jinju. His family was a prestigious family representing Bupyeong, but belonged to the Sobuk line (小北系), a political minority. This environment is believed to have exerted significant influence on his life and the development of his philosophy.
His life extended through historic events such as the so‐called 1862 Peasant Uprising, the reign of Prince Daewongun, and the opening of the country to foreign powers. His perception of reality and reform theory were closely linked to such historical situations. He criticized narrow‐minded Neo‐Confucian scholars, and advocated pragmatic and creative thinking. He asserted reforming evil practices prevalent throughout the Joseon society, and committed himself to making strategies to cope with imperialist powers.
His perception of domestic political situations was on the same line with that of Daewongun. He believed that the root of the 1896 Peasant Uprising was in the inadequate operation of the tax policies. For this reason, he argued for the thorough reform of the three levies (三政). In order to correct evil practices in military service, he maintained the reform of private academies, and proposed a unique reform plan for the seed grain loan system. In addition, he expressed his active support for Daewongun’s reform policies.
As to his perception of foreign relations, on the other hand, he can be called a typical theorist of Dong‐do‐seo‐gi (東道西器論者–theory pursuing Eastern moralities and Western things). He was negative against the indiscreet import of Western civilization. Nevertheless, he insisted on active import of Western weapons including cannons and Western scientific civilization. His intention was to resist Western powers’ invasion and exploitation. These arguments came from his open attitude toward Neo‐Confucianism. Different from other Neo‐Confucian scholars, he criticized the attitude of relying only on Chu Hsi's annotations in study. Rather he believed it more important to grasp the essence of learning through practice in person and serious research. This attitude led him to recognize Western pragmatic weapons and scientific civilization, and advocated the active import of these things. In this sense, his philosophy is considered a somewhat advanced form of the theory of Dong‐do‐seo‐gi.
이 글은 19세기말의 학자이자 관료인 류태형의 사상과 그 특성을 살펴보았다. 그는 부평에 세거하던 진주류씨(晉州柳氏) 시시내(始川) 문중의 일원이었다. 그의 집안은 부평을 대표하는 명문가였으나, 정치적으로 소수파였던 소북계(小北系)에 속하였다. 이러한 환경은 그의 생애와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이른바 임술농민항쟁과 대원군 집권기, 그리고 문호개방에 걸쳐있었다. 그의 현실 인식과 개혁론은 이러한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고루한 주자학자를 비판하면서 실용적이고 창조적인 사고 전환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선사회에 만연한 폐단들을 개혁하자고 주장하였고, 제국주의 열강에 대응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골몰하였다.
국내 정치 상황과 개혁 방법에 대한 그의 인식은 대원군의 그것과 궤를 같이 하였다. 그는 1862년 농민항쟁의 근원이 조세정책의 잘못된 운영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때문에 삼정(三政)의 운영상의 폐단을 바로 잡자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개혁안 중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환곡제도 개혁이었다. 그는 환곡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환곡이 장부상으로만 존재한다는데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국가와 관료,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 모두 부담하여 원곡을 보충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한 야기되는 경비 부족문제는 현인 1인당 한 개의 서원만 허용하고, 나머지 서원은 모두 혁파하여 국가재정에 귀속시키자고 하였다. 아울러 대원군의 개혁정책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한편 대외관계에 대한 인식은 전형적인 동도서기론자(東道西器論者)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무분별한 서양문물의 도입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대포를 비롯한 서양의 무기와 서양의 과학 문명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양세력의 침탈을 막아내자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주자학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여타 주자학자와 달리 학문을 연구함에 있어 주자의 주석에만 의존하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오히려 스스로의 실천과 진지한 연구를 통해 학문의 요체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자세가 실용적인 서양의 무기와 과학 문명을 긍정적으로 파악하게 하였고, 그것의 적극적인 도입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상은 동도서기론 중에서도 좀더 발전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분석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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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3 | 0.63 | 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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