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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석지부(惜志賦)」에 대한 고찰 = A Study on Dasan’s 「Seokji-bu」 during the exile period in Jan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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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66(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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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2500여 수에 이르는데, 다산의 賦는 단 2편만 전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석지부」를 대상으로, 다산의 부 창작 이유와, 寡作의 배경, 그리고 유배기와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부가 우리 문학사에 들어온 것은 남북국 시대의 일이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科賦로 정착하게 되고 형식주의로 치우치게 된다. 과거를 준비하는 잠재적 관료들의 부 습작 열기는 뜨거웠지만, 더 이상 부는 문학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 후기 문인들의 문집에 부가 실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산의 부가 2편만 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산이 과거를 준비한 18세기 후반도 이미 부가 과부로 정착한 후 였다. 다산 역시 과시를 준비하며 부 창작을 연습했지만 부를 향유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던 다산이 1801년 長鬐 유배기에 새삼스럽게 부를 지은 것이다.
유배지의 다산은 스스로 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고, 자신을 당쟁의 희생자로 인식하였다. 장기에서 쓴 글에서는 신유박해가 천주교와 유교의 사상적 대립이 아닌 당쟁의 결과라는 다산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異端과 異端邪說도 구분했는데, 다산에 따르면 천주교는 이단이지 이단사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산은 천주교 때문에 유배객이 된 것이다.
유배지의 다산은 부의 기원을 생각했다. 失志한 선비들의 문학 양식이던 부와, 정치적 불우함을 드러내던 楚辭를 떠올렸다. 다산은 이미 1790년 海美 유배 무렵의 시에서도 정치적 곤경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초사의 영향을 보여준 바가 있다. 자신은 죄가 없는데도 당쟁의 결과 유배객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다산은 유배지 장기에서 초사와 부를 소환했고, 辭와 賦의 양식을 통해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었다. 「석지부」에서 다산은 公冶長과 張橫渠를 거론하여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말하였고, 韓愈와 蘇軾을 언급하여 자신의 현재적 곤경을 넘어서는 미래적 전망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운명에 순응하는 체념적 정서가 아니다. 오히려 깊은 뿌리와 무성한 가지를 이루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죄가 없으므로 떳떳한 다산은 자신이 천명을 받들고 있어 불만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이전의 문인들이 사와 부를 지었던 실지의 상황처럼, 지금 다산이 처한 상황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외부 문제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도 ‘惜志’인 것이다.
The number of Dasan's poems amounts to 2,500, and only two works of Dasan's Bu (賦) have been handed down. This is a study that traces the relationship between Dasan's reasons for creation of Bu, the background of fewer work productions (寡作), and the relevance to his exile period for 「Seokji-bu」.
It was during the North and South States Period that Bu entered our history of literature, but in the late Joseon, it was settled as Bu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 (科賦), leading to being biased toward formalism. The practice writing fever of potential government officials preparing for a civil service examination was hot, but Bu was no longer the object of literary enjoyment. As a result, Bu was rarely included in the literature of the literati in the late Joseon. It was the reason that only two works of Dasan's Bu have been handed down.
In the late 17th century, when Dasan prepared for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t was already after Bu was settled in Bu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 Dasan also practiced Bu creation to prepare his civil service examination, but there is no trace that he enjoyed Bu. Then Dasan newly wrote Bu during the exile in Janggi (長鬐) in 1801.
Dasan in the exile place did not consider himself guilty, and he recognized himself as a victim of the party struggle. Dasan's thoughts that the Shinyu Persecution is not an ideological confrontation between Catholicism and Confucianism, but a result of the party struggle, is revealed in the writings written in Janggi. Dasan also distinguished between yi duan (異端) and yi duan xie shuo (異端邪說), and according to Dasan, Catholic was yi duan, not yi duan xie shuo. Nevertheless, Dasan, who was in the position of deportee, had a hard time accepting his situation.
Dasan in the exile place thought of Bu's origins. He recalled Bu, the disappointed (失志) scholars' literary style, and Chosa (Cho poetry; 楚辭), which showed political discomfort. Dasan had already shown Chosa's influence in the process of embodying political predicament even in poems around his exile of Haemi (海美) in 1790. Dasan, who thought that he became a deportee as a result of the party struggle even though he was innocent, summoned Chosa and Bu, and revealed his emotions through the style of Sa-Bu (辭-賦).
In 「Seokji-bu」, Dasan spoke of Gong Ye Chang (公冶長) and Zhang Heng-qu (張橫渠) to express his unfair feelings, and by mentioning Han Yu (韓愈) and Su Shi (蘇軾), he presented a future outlook beyond his present plight. It was not a sentiment of resignation that conforms to fate. Rather, it was a commitment to oneself to achieve deep roots and lush branches. Dasan, who is proud of himself because he is innocent, says he is not dissatisfied with the heavenly mandate. This is because, like the disappointment that the literati wrote Sa and Bu before, Dasan's situation is not his own fault, but an external problem. That is why the title of the work is also 'Seokji (sorrow; 惜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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