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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로독트린의 변용: 파나마회의와 ‘명백한 운명’ 시기를 중심으로 = Readjustment of the Monroe Doctrine: Based on Congress of Panama and ‘Manifest Destiny’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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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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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deals with the course of the settlement of the Monroe Doctrine of 1823 prior to the Civil War in American politics. The starting point of the paper comes from this crucial, but untouched question: how was the Monroe Doctrine established as the touchstone of American foreign policy in the 19th century? Early Americans have shown a great deal of respect for the diplomatic principles of George Washington and Thomas Jefferson as shown in the ‘farewell address’ and the inaugural address respectively, which set the tone of early American principle of neutrality with such famous phrase as “permanent alliance” or “entangling alliance” with none. How did the Monroe Doctrine bypass the these sacred principles of the Founding Fathers and get it established as the touchstone of early American foreign policy? In order to answer the above questions, the paper selects the three issues that represent the early American expansionism: Congress of Panama, Annexation of Texas, and Dispute over Oregon. Debates over sending US delegates to the Congress of Panama in 1826 has some historical significance in that the Monroe Doctrine had been mentioned and remembered, though it was done much less in its frequency and sincerity compared with the principles of Washington and Jefferson. During the debates over the annexation of Texas, southern politicians used the Monroe Doctrine, which had long been forgotten since the Panama issue, as an excuse to secure their regional interest of slavery. President James Polk mentioned the Monroe Doctrine in his first annual message to the Congress in 1845; yet it cannot be understood as a meaningful revival of the Monroe Doctrine, because he used the doctrine for his ambition for California, not for the territory of Oregon, the central region and issue that fired off the fever of ‘Manifest Destiny’ nationwide.
In retrospect, the Monroe Doctrine had not been remembered or used by most Americans in the years prior to the Civil War as a serious principle they ought to hold onto as a guide to nation’s foreign policy. ‘Manifest Destiny’ represents the American expansionism in the 1840s but had little direct connection to the Monroe Doctrine. If one traces how the Monroe Doctrine was able to establish itself as the sacred American principle, he or she has to focus more on the period of late 19th century. Nevertheless, history is inevitably made upon by the compilation of long and gradual historical sequences; the debates over the Panama Congress and the Texas and Oregon territories grew as the roots of a giant tree of the Monroe Doctrine.
본 논문은 먼로독트린이 어떻게 초기 미국 외교의 원칙인 ‘독트린’으로 정착하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1823년 먼로독트린이 발표된 이후 미국 대통령들과 의원들을 포함해서 미국 지도자들이 먼로독트린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받아들였으며, 어떻게 당대의 현안에 적용했을까? 먼로독트린의 기본적인 원칙이 후대에 가서 어떻게 변용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선택한 주요 시대적 배경은 1826년 파나마회의와 이른바 ‘명백한 운명’의 시기인 1840년대 중반이다.
파나마 미션이 먼로독트린의 원칙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나, 1826년 상황이 먼로독트린에 근거해서 미국의 개입이 필요한 상황인가에 대한 논쟁은 미국 지도자들이 먼로독트린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판단하는 주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무엇보다도, 한동안 “역사 속 문서에 속할 뿐”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잊힌 먼로독트린이 다시금 부활했다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1844년 남부 의원들이 먼로독트린에 근거해서 텍사스 합병론을 주장했다. 남부 의원들의 주장은 노예제도를 고수하려는 지역주의의 발로였다. 하지만 텍사스 합병 논쟁에서 남부가 지역 이기주의에 근거해서 먼로독트린을 변용했다하더라도, 그것은 파나마회의 논쟁 이후 오랫동안 기억이나 논의에서 사라졌던 먼로독트린의 존재를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역사가들은 오리건 영토 분쟁을 1840년대 미국의 대륙팽창의 열기를 대변하는 ‘명백한 운명’의 슬로건 아래 놓았다. 하지만 ‘명백한 운명’이 1840년대 미국 팽창주의를 대변하지만, 먼로독트린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잊힌 먼로독트린이 누군가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그것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먼로독트린 역시 파나마회의와 ‘명백한 운명’의 시대를 거쳐 훗날 명실상부한 독트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그루터기가 자라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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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28 | 0.28 | 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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