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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산기지의 군사전략적 기능에 대하여 -1904년 러일전쟁에서 1930년대 만주사변기의 ‘조선군’의 역할과 기능- = About the Japanese occupation military strategic functions of the Yongsan Garrison – Tracks of Japanese Army of Korea from Russo-Japanese War in 1904 to the Manchuria in the 1930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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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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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개전과 동시에 한국을 불법적으로 강점하기 시작한 일본은 동 2월 26일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그 제4조의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다’는 규정에 근거하여 용산 일대의 300만평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용산기지의 출발이었으며, 2017년 현재까지도 용산기지의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용산기지의 근대사의 출발점은 일본군의 한국 강점의 역사이자, ‘조선주둔 일본군’(이하 ‘조선군’으로 약칭함)의 역사이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의 핵심적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즉 용산의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군’의 역사의 궤적을 함께 살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용산기지를 통해서 보는 ‘조선군’의 군사전략적 기능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일제는 왜 용산을 비롯한 조선의 주요한 지점을 강제로 수용하였고, 또 ‘조선군’을 편성하였으며, ‘조선군’에 대해서 어떠한 군사전략적인 측면을 계획하고 실천하고자 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본고의 과제이기도 하다.
러일전쟁의 실질적인 발발은 일본과 러시아간의 구체적 교전행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주요 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무력 점령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의 조항에 의거하여 그후 조선에 대한 일본군의 무제한에 가까운 군사적 점령과 징용 및 징발 등 ‘군사동맹’을 빙자한 전쟁에 대한 강제 동원이 행해졌다. 러일전쟁시의 한국에서의 일본군은 크게 러시아와의 전투에 주력하는 작전부대와 한국내의 무력점령, 치안확보, 방비에 종사하면서 병참부대로서 작전부대를 지원하는 한국주차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에 상설된 2개 사단은 원래의 목적은 대 러시아 및 대 중국전을 상정한 부대로서 증설된 것이었지만 조선 내부와 국경의 불안한 정세로 인하여 주로 조선의 치안유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본래의 목적인 대러시아, 대중국을 겨냥한 북방의 군대로서의 모습으로 변화해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가면서 ‘조선군’의 군사전략적 활용에 대해서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사건이 1920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일어난 경신참변 혹은 간도참변으로 알려진 ‘간도출병’이다.
조선의 국경 넘어 중국에서 내정이 불안정할 경우에 ‘조선군’을 중국으로 월경 파견하는 양태가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928년 이래로 만주의 관동군과 조선을 관할하던 ‘조선군’이 중국에서 불법적인 군사행동을 일으킬 경우에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이미 1928년 이래로 만주를 중국의 장제스 정권에서 분리시켜 일본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하는 움직임이 관동군과 ‘조선군’ 참모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서로 묵인, 협조하고 있는 움직임이 엿보인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군’은 식민지조선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인 물리적 장치로서, 그리고 대륙 침략을 위한 당시 일본 최선봉의 군대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 ‘조선군’이 만주사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배경에는 만주에서의 위기, 즉 식민지조선에서의 통치의 위기감이 심화되자 이를 근본적으로 해...
Japan, which began illegally occupying Korea when the Russo-Japanese War broke out on February 8, 1904, imposed a treaty on the Korean government on February 26 and was able to enforce its military capacity under Article 4, which was based on the assumption of Article 4. This was the start of what was called the Yongsan base, and the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military presence at the base has continued to this day until 2017. The starting point for the modern history of Yongsan Garrison is the history of Korea's strength in the Japanese armed forces, the history of the “Japanese armed forces in Korea” (hereinafter referred to as the “Japanese Army of Korea(Joseon-gun, 조선군)”, and the key space for the establishment of Japanese imperialistic attacks and control.
In other words, to understand Yongsan's modern history, it is necessary to explore the historical trajectory of the “Japanese Army of Korea(Joseon-gun, 조선군)” And in this Go, I would like to focus on the military strategic function of the “Japanese Army of Korea(Joseon-gun, 조선군)” seen through the Yongsan base. Japan has why it forced to accept key branches of Korea, including Yongsan, and also formed a “Cho-seon-gun”, and planned to explore and implement any aspect of its military strategy.
The real outbreak of the Russo-Japanese War should be noted that it did originate in the Japanese Army's military occupation of Korea. Under the provisions of the 1904 Korea-Japan protocol, Japan imposed a mandatory mobilization of military forces under the pretext of military occupation of the Korea.
The Japanese troops in Russia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can be seen as the Korean parking force supporting the operation unit, while being engaged in armed occupation, security securing, and defending in Korea.
The two divisions permanently stationed in Korea focused mostly on maintaining the security of the Korea because of the unstable situation inside and on the border of the Korea, although the original purpose was to expand as a unit that had planned to fight Russia and China. The situation could have been changed to what it was originally intended for : Russia versus China, a northern army, by the mid 1930s.
It is also noteworthy that it has already occurred since the mid-1920s to send “Joseon-gun” to China by menstruation in case of internal unrest.
The “Kwan-to” military in Manchuria and “Joseon-gun” have shown a relationship to work together in case of illegal military activities in China. Already since 1928, moves to isolate Manchuria from the Chinese majorette and keep it under the influence of Japan have been made implicitly and conscientiously between the Kwan-to Army and its “Joseon-gun” advisers.
As you can see above, “Joseon-gun” had the characteristic of being Japan's top military force as a military device to maintain its colonial rule and as a first aid to invasion of the continent. And behind Joseon-gun's active involvement in the Manchurian incidents was its strategy to fundamentally address them as the crisis in Manchuria, the crisis of control in colonial Korea, deepened.
Meanwhile, the role of the “Joseon-gun” in the wake of the Manchurian incidents strengthened its character as a preparation for the Soviet war, exclusively in charge of the defense of Korea. But as stated, the “Joseon-gun”, along the border with 1938, has gradually changed its key role as the rear support of the Kwan-to Army and as a military base for Japan's continental invasion.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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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6-02-26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The History of Seoul -> Seoul and History | KCI등재 |
2016-02-03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鄕土서울 -> 서울과 역사외국어명 : The Hyangto Seoul -> The History of Seoul | KCI등재 |
2015-10-22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 서울역사편찬원영문명 : The City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Seoul ->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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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27 | 0.27 | 0.3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35 | 0.33 | 1.024 | 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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