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펠라리 추기경과 랑글루아 신부의 서한 연구 = A Study on the Letters of Cardinal Capellari and Father Langl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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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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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C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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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수록면
1-27(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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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카펠라리 추기경과 랑글루아 신부 간의 3통의 서한은 교황청이 조선의 선교사 파견을 위해 파리외방전교회와 처음으로 공식적 접촉을 시도한 역사적 사료로서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와 서한의 신학적 분석작업을 통해서 그 서한의 의미들을 알 수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한 조선교회의 붕괴상황은 1811년 이여진을 통한 성직자영입 운동의 시작으로 재건을 꿈꾸게 되었는데, 이여진이 북경교회에 전달한 성직자 요청 서한은 1814년 교황청으로 전달되었고 조선교회와 교황청의 최초의 접촉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다만 유럽교회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으로 선교지원금이 중단되고, 중국교회의 박해상황으로 조선 선교사 파견 계획은 무산되었다. 1816년 정하상의 북경 방문으로 북경교구의 플로리아노 신부와 요한 신부의 입국 또한 실패로 끝났다. 1825년 유진길을 통해 북경으로 전달된 조선신자들의 서한이 1827년 교황청으로 전달되었는데, 이 서한은 긴급한 선교사의 입국 필요성과 함께 조선교회의 안정적인 사목을 위한 요청도 새롭게 담고 있었다. 이 서한은 유럽교회가 교회재건으로 분주한 분위기에 교황청으로 도착했고, 교황청도 조선 선교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나 조선 선교를 어렵게 하는 중국교회의 박해상황과 포르투갈의 선교보호권으로 인해서 조선 선교를 북경교구에 위탁하기도 어렵고, 교황청이 선교보호권 국가에 직접 개입하기도 어려웠기에 파리외방전교회라는 선교 단체를 통한 조선 선교를 계획하게 된다. 1827년 9월 1일 포교성성 장관인 카펠라리 추기경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은 추기경회의의 결정에 따라 조선 선교를 위한 교황청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첫 공식 접촉이었다.
1827년 9월 1일 카펠라리 추기경의 서한은 조선교회의 소개와 그들의 선교사 파견요청 소식을 전하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교회에 선교사를 파견해 주기를 청하고 있다. 중국교회에 조선 선교를 위탁하기 힘든 상황을 전달하고 있으며, 포르투갈 선교보호권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역사적 배경연구를 통해 파리외방전교회를 선택한 교황청의 인식 안에는 그러한 고심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유진길의 서한에 담겨있는 조선교회를 위한 안정적인 선교사 파견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가 조선교회를 위한 안정적 선교사 파견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교황청의 판단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서한의 답장인 1827년 9월 29일 랑글루아 신부의 서한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를 위한 현실적 어려움 4가지가 담겨있다. 선교사의 부족, 파리외방전교회의 재정적 부족, 선교사들의 조선입국의 어려움, 새 선교지 결정을 위한 장상회의 필요가 그것들이었다. 이 서한을 통해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위해 해결해야 할 목록들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파리외방전교회 또한 조선 선교라는 목표를 위한 현실적 어려움에 처해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27년 11월 17일 카펠라리추기경의 두 번째 서한은 랑글루아 신부 서한에 담긴 4가지 현실적 어려움에 대한 수긍과 교황청의 지원을 약속하는 내용, 그리고 교황청의 조선선교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우리는 카펠라리 추기경과 랑글루아 신부의 서한을 통해, 교황청의 조선 선교를 위한 공식적 행보의 동기가 1825년 유진길을 통해서 전달된 조선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서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11년 이여진을 통해 전달된 서한으로 조선교회와 교황청의 첫 접촉이 있었고, 1825년 유진길을 통해 전달된 서한을 통해 안정적 선교사 파견이라는 조선교회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유박해 이후 조선교회의 재건을 위한 조선교회의 성직자영입 운동의 큰 결실이 이 서한에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국교회의 박해상황과 포르투갈의 선교보호권이라는 장애물이 파리외방전교회라는 선교단체를 통한 조선 선교의 수단이 되었으며, 파리외방전교회의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의 조선 선교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조선의 선교사 파견을 가능하게 했음을 이 서한 연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The three letters between Cardinal Capellari and Father Langlois in 1827 are the first historical records in which the Vatican attempted to make official contact with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for the dispatch of missionaries to Joseon. I could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letter.
The collapse of the Joseon Church due to the Shinyu Persecution in 1801 dreamed of rebuilding with the start of the priest recruitment movement through Yeo-jin Lee in 1811. has historical significance as a contact with However, due to the catholic political situation of the European churches, mission support funds were suspended, and the plan to send missionaries to Joseon was canceled due to the persecution of the Chinese churches. In 1816, due to Jeong Ha-sang’s visit to Beijing, the entry of Fathers Floriano and Father John from the Diocese of Beijing also ended in failure. A letter from Joseon believers delivered to Beijing through Yu Jin-gil in 1825 was delivered to the Vatican in 1827, and this letter contained the urgent need for missionaries to enter the country and a new request for stable pastoral care of the Joseon Church. This letter arrived at the Vatican in an atmosphere where European churches were busy rebuilding churches, and the Vatican also sought specific methods for missionary work in Joseon. However, due to the persecution of the Chinese Church and Portugal’s right to protect missions, it was difficult to entrust the missionary work to the Diocese of Beijing, and it was difficult for the Holy See to directly intervene in countries with the right to protect missions.
On September 1, 1827, Cardinal Capellari’s letter introduced the Joseon Church and requested that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send missionaries to the Joseon Church. It conveys the difficult situation of consigning the Joseon mission to the Chinese church, and although there is no mention of the Portuguese missionary protection right, such hardship can be seen in the perception of the Holy See that chose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through historical background research. In addition, we can see the Vatican’s judgment that the Seminary of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will enable stable missionary dispatch for the Joseon Church by accepting the request for stable dispatch of missionaries for the Joseon Church contained in Eugene Gil’s letter. In response to this letter, Father Langlois’ letter dated September 29, 1827, contains four realistic difficulties for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s missionary work in Joseon. They were the lack of missionaries, the financial shortage of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the difficulty of missionaries entering Korea, and the need of the Superior Council to decide on a new missionary field. Through this letter, we can see the list that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has to solve for Joseon mission. As such, it can be seen that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was also facing a realistic difficulty for the goal of missionary work in Joseon. The second letter of Cardinal Capellari, dated November 17, 1827, contains an acknowledgment of the four practical difficulties contained in the letter of Father Langlois, a promise of support from the Vatican, and a glimpse of the Vatican's strong will for missionary work in Joseon.
Through the letters of Cardinal Capellari and Father Langloa, we can confirm that the official motive for the Vatican’s move for missionary work in Joseon was the letter sent to the Pope by the Catholics in Joseon delivered through Eugene Gil in 1825. In 1811, the first contact between the Joseon Church and the Vatican was made through a letter delivered through Lee Yeo-jin, and through a letter delivered through Yu Jin-gil in 1825, the Joseon Church’s long-cherished wish of stable missionary dispatch was fulfi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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