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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儒家)는 어떻게 "쓸모없음""(不能用)을 "쓸모있음"(흔受用)으로 바꿨나? - "충효를 모두 가질 수 없다"라는 곤경 = How has Confucianism become "being useful" from "being useless"? -An analysis of the dilemma between filial piety and loyal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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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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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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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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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189(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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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는 역사적으로 대비되는 측면이 크게 존재해왔지만, 합리적으로 해석되지 못해왔다. 우선, 공맹(孔孟) 성현이 살던 시대에서도 “쓸모 없는”(不能用) 상태에 처해 있었다. 다른 한편, 한대(漢代) “독존유술”(獨尊儒術) 이후 이천 여 년 간 도덕 품격과 학문 지식 측면에서 공맹보다 못했던 무수한 유자들이 통치자의 중용을 받아왔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이론적으로 유가의 명운에 심각한 전환점이 발생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한 공맹유학과 순자ㆍ동중서(荀董) 유학이 “충효를 모두 가질 수 없다”라는 두 어려운 곤경을 처리해야 할 때 취했던 확연히 다른 두 가지 태도이기도 하다. 공맹은 비록 “효”(孝)와 “충”(忠)의 조화와 통일을 강조하였고, 더 나아가 “효를 옮겨 충으로 만든다”(移孝作忠)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자가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혈연 친정을 따르는 것이 근본적인 지위를 누릴 뿐만 아니라, “부모를 섬김이 크다”라는 원칙을 최고의 의의로 두었다. 즉, “효”가 “충”을 능가한다는 궁극적 의의를 잠재적으로 부여하여 “충효를 모두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는 “효를 버리고 충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응당 “충을 버리고 효를 다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신하와 백성은 자신의 부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통치자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에 아까워하지 않는 취사(取捨) 태도를 부추겼고, “군주에게 충성(忠君)”을 강조했던 공맹이 당시 통치자들에게 중용되는 것을 막았다. 순자는 이점을 알았기에 혈연 친정의 근본 지위를 긍정하는 기초 하에 군주가 신하와 백성을 부양하고 교육시키는 이중 기능을 확연히 드러내었다. 즉, 부모는 자녀를 낳고 기르기만 한다는 일방적인 기능을 초월하도록 하여 “예의는 성왕보다 큰 것이 없다”로 바꿔 주장하였다. 이렇게 “군주는 부모보다 높고”, “충은 효보다 높다”라는 원칙을 내세워 신하와 백성에게 명확하게 요구하여 “충효를 모두 가질 수 없다”라는 곤경을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유가는 “쓸모없음”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대의 동중서(董仲舒)는 순자의 이러한 입장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왕도삼강(王道三綱)”이라는 틀 속에서 군신관계를 부자관계와 부부관계 앞에 두어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처강(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妻綱)”을 강조하였다. 이는 맹자가 인지했던 “인지대륜(人之大倫)”과 명확하게 구별되지만, 오히려 순자가 인지한“군신, 부자, 형제, 부부(君臣, 父子, 兄弟, 夫婦)”라는 “의지륜(義之倫)”과는 근본적으로 일치하게 되었고, “민을 굽히고 군주를 펼쳐는(屈民而伸君)” “춘추의 대의(春秋之大義)”에 기대어 “왕”의 “지고무상의 윤리적 지위”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유가사조는 결국 공맹이 주장한 “효는 충보다 높다”는 “쓸모없음”의 경지에서 벗어나 “충은 효보다 높다”라는 기초에서 후대 조정관부 앞에 “쓸모있음”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볼 때, 유가사조는 전국시대에서 한대까지의 명운의 전환은 결코 “유일한” “교육에 대한 농단”에 귀인될 수 없다. 더 중요한 원인은 동중서의 “삼강”설이 공맹의 혈연 근본정신에 기초했다고 하는것이 낫다. 또한 순자의 “예의는 성왕보다 큰 것이 없다”라는 신조와 법가의 어떤 관념이 융합되어 “군주지상”을 고취시켰을 뿐만 아니라, “충은 효보다 높다”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왕의 편애, 주요 대신의흥미, 관원의 관심”과 충분히 영합했다고 할 수 있고, 후자가 의식 형태의 정신적 지주를 찾고 있을 때, 그 목표는 기타 사조(법가를 포함한)에서 유가사조로 전환되게 하였다.
더보기There is a strange and yet seldom explained phenomenon in the history of Confucianism: on the one hand, Kongzi and Mengzi were rarely put in an important position by their contemporary rulers when they were alive; on the other, so many Confucians have been put in very important positions in more than two thousand years since the Han Dynasty, although they cannot be compared favorably with Kongzi and Mengzi at all. The basic reason why the destiny of Confucianism has taken such a dramatic turn lies in its two very different attitudes towards the dilemma between filial piety and loyalty: while Kongzi and Mengzi also emphasized the harmony of filial Piety and loyalty, they usually placed filial piety above loyalty in the case of conflict and demanded that people should choose filial piety to their parents at the cost of loyalty to their rulers according to the principle “filial piety is the greatest”. It is this very choice that makes them not be put in an important position by their contemporary rulers, even though they themselves indeed stressed loyalty to the ruler very much. Xunzi was aware of this theoretic defect and thus argued that the functions of the ruler to bring up and teach subjects were far more important than the functions of parents to bear and bring up children. Then he demanded that people should choose loyalty to their rulers at the cost of filial piety to their parents in the case of conflict according to the principle “loyalty to the ruler is the greatest”. As a famous Confucian in the Han Dynasty, Dong Zhongshu carried on this principle and definitely placed loyalty to the ruler above filial piety to parents in the so.called “Three Cardinal Guides”, thereby helping Confucianism eventually in being highly and even solely honored by the rulers in more than two thousand years. Viewed from this perspective, the dramatic turn of the destiny of Confucianism in the history could not be attributed merely to its monopoly of education, but first and foremost to the in.depth change of its attitude towards the dilemma between filial piety and loyal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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