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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도제도와 제이조약(The West Indies and Jay’s Treaty in 1794) = The West Indies and Jay’s Treaty in 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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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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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독립하기 이전, 영국은 이윤이 많이 남는 열대작물인 설탕을 서인도제도(West Indies)에서 재배하기 위해 가까이에 있는 식민지 미국을 설탕섬을 위한 빵-바구니 역할을 부여했다. 식민지 미국은 서인도제도의 대농장(plantation)에서 필요한 식량(provision), 생필품 그리고 목재를 보냈고 서인도제도에서 생산된 설탕을 포함하여 커피, 당밀, 럼과 같은 물건을 식민지 미국으로 싣고 와 영국 본국으로 재수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 서인도제도 그리고 식민지 미국을 둘러싼 이러한 삼각무역의 구도는 미국이 독립을 하면서 무너지게 되었다. 기존 연구는 미국 독립 이후에 이러한 삼각무역 구도가 무너지게 된 이유에 대해 미국에 대한 영국의 강경정책에 초점을 주로 맞추었다. 따라서 독립 이후에 대한 연구는 주로 독립국가인 미국과 영국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주로 설명해왔다. 이러한 연구는 미국 독립 이전과 달리 미국 독립 이후 서인도제도와 미국의 관계를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에 대한 영국의 강경정책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서인도제도에 미국의 상선이 들어가 교역을 하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미국상인들은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서인도제도와의 교역을 멈출 수가 없었다. 미국상인들은 셔틀 트랜스퍼(Suttle Transfer), 깃발 바꾸어 달기, 허가장 위조, 밀수(Smuggling)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서인도제도와의 교역을 지속해왔다. 서인도제도와 미국 내의 교역은 1794년 이전까지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에 대한 영국의 강경정책에 직면하여 미국의 정책지도자들은 미국과 서인도제도 간에 자유로운 교역을 위해 건국 초기부터 노력해왔다. 외국과 맺을 조약의 계획서인 모델조약(Model Treaty)에서 애덤스는 자유로운 항해(Free ships make free goods)를 강조하며 서인도제도와 자유로운 교역을 할 수 있기를 원했다. 1783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은 이후 미국은 영국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통상조약을 맺고자 노력했다. 1789년과 1790년 제퍼슨과 매디슨이 발의한 무게에 따른 선박세 징수법안(Tonnage Bill)에 대한 논쟁에서도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매디슨(James Madison) 그리고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큰 틀에서 외국과의 자유로운 통상을 원했고 특히 서인도제도의 항구를 개방하여 미국이 자유롭게 통상을 하여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을 그 목표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미국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다 1793년 유럽전쟁으로 인하여 영국의 경제수치가 악화되고 국내 곡물사정이 좋지 않자 영국은 결국 미국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어 1794년 12월 미국과 통상조약(Treaty of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between Great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즉 제이조약(Jay’s Treaty)을 맺었다.
제이조약과 관련한 기존 연구는 제이조약이 미국과 영국이 맺은 통상조약이었다는 의의보다는 제이조약이 미국 정치에 끼친 영향 즉 이 조약의 비준을 두고 남부와 북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의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미국 양당정치의 기원이 되었다는 데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의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되었던 제이조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논쟁의 중심에 서인도제도와의 교역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약의 내용 중에서 미국 항구에서 미국의 배와 영국 배의 ...
Whil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till thirteen colonies under British rule, Great Britain gave the colonies the role of “bread basket” to support the empire’s very profitable West Indies colonies which focused almost exclusively on cash crops like sugar cane. The continental colonies supplied needed foodstuffs, lumber, and necessary goods for living, and the West Indies returned the favor with sugar, coffee, molasses, and rum which was also exported to the seat of the empire in Britain, which manufactured higher-end goods. This triangle of trade collapsed after the independence of the 13 colonies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U.S. This research explores the reasons for the collapse of this economic order after independence and Britain’s turning to a hardline stance on the US. The focus has usually been on the U.S. and Great Britain and their interplay as sovereign states since after independence, the U.S. relationship with the West Indies became indirect and was not considered important.
As part of its official hardline policy, Britain outlawed the entrance of U.S. merchant vessels in the West Indies, but U.S. merchants, reaping immense gain from such trade, could not cease operations. To get around restrictions, merchants used intermediary shuttle transfers, changed their flags duplicitously, falsified and forged paperwork, and engaged in smuggling. So successful were they, that by 1794, West Indies exchange had surpassed even pre-war levels. From the establishment of an independent state, continental American political leaders had worked to make free and direct trade between the West Indies possible. John Adams’s desire was to sign ‘Model Treaties’ with foreign countries to emphasize ‘Free ships make free goods’. From 1783, when Britain recognized the U.S.’s independence, American leaders had worked to get an economic treaty with Britain to resolve the dispute. In 1789 and 1790, through discussion on Thomas Jefferson and James Madison’s proposed shipping taxes legislation as Tonnage Bill, Jefferson, Madison, as well as Alexander Hamilton clearly wanted a grand framework for free commerce with foreign countries. Despite all of this, Britain maintained its hardline stance. However, in 1793 war broke out in Europe and Britain’s economic situation became dire and the supply of cereals dwindled. In response, in December of 1794 Britain dropped its hardline stance and signed the Treaty of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between Great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Research on Jay’s Treaty and related topics places more significance on the growing Congressional divide over the North and the South and their divergent interests, the South of course, favoring free trade, as well as the formation of two rival parties. We can confirm that within Congressional debate, the West Indies trade issue was at the center. The treaty stipulated that U.S. ports could not discriminate between domestic and British ships when levying charges (no protectionism), but highlighting the importance of the West Indies were Britain’s demands that U.S. ships in the West Indies be capped at 60 tons and for no U.S. ships to carry the chief exports of the West Indies (sugar, molasses, coffee, cocoa, rum, fabric) to any third country.
The ratification of the treaty within the U.S. Congress was contentious. Though both Southern and Northern representatives passed the bill as is, the two sides had disagreements over the treaty as well as incongruent interests, an aspect often overlooked in historical studies. Even during Britain’s hardline policy, America continued its trade with the West Indies. The 13 states maintained a tight relationship with the West Indies and among the polities, the Tidewater states, the South, and the Britain-facing Philadelphia leaders in particular banded together to maintain and promote trade.
Studies of the 18th and early half of the 19th centuries have principally focused on the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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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28 | 0.28 | 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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