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흥륜사 彌勒像과 황룡사 丈六尊像 그리고 진흥왕과 거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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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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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C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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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146(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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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은 나라를 흥륭하게 하기 위해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화랑도들이 익혀야 할 사상이 風月道(風流道)였다. 풍월도는 유교, 도교, 불교사상을 모두 포함하였다. 이 풍월도는 불교 사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성립 시기는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이후 진흥왕 대에 화랑 사다함이 활동한 562년 이전 어느 시기로 보인다.
화랑들이 풍월도를 익히면서 수련하는 방법은 도의의 연마, 가악을 즐기는 것, 산수를 유람하는 것 등이었다. 도의는 풍월도에서 강조하는 유, 도, 불 사상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때 삼교를 모두 배운 승려 낭도들이 스승의 역할을 일정하게 하였다.
신라에서 불교 공인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사찰이 흥륜사이다. 이곳에 미륵불이 모셔졌다. 미륵불은 귀족세력을 상징하였다. 551년에 성년이 되어 친정을 하게 된 진흥왕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황룡사를 창건하였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황룡사에 귀족세력을 상징하는 미륵불을 주불로 안치하였다. 미륵불의 안치는 귀족세력과의 타협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진흥왕은 전류성왕을 자처하면서 장자 동륜을 태자로 삼고 강력한 왕권 확립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장육상을 황룡사에 주불로 안치한 것이다. 이로써 황룡사의 주불은 미륵불에서 석가불로 바뀌었다. 장육상은 석가불이었다. 석가불은 왕을 상징하였다. 이에 따라 황룡사는 왕권을 상징하는 사찰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진흥왕은 阿育王도 만들지 못한 장육상을 만듦으로써 자신이 뛰어난 군주임을 과시하였다.
진흥왕의 이러한 왕권 강화정책에 귀족들이 반발하였다. 이 귀족들을 대표한 인물이 거칠부였다. 섭정기에 그는 진흥왕의 정치를 보좌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영토를 확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렇지만 진흥왕이 재위 후반에 추진한 강력한 왕권 확립 정책에는 반대하였다. 거칠부는 왕권과 귀족과의 협의에 의한 통치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동륜태자가 죽은 후 후계 구도에 대해서는 손자를 세우려는 진흥왕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장육존상이 눈물을 흘린 이듬해에 진흥왕이 돌아갔다고 한 것은 진흥왕과 거칠부 사이의 갈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거칠부는 진지왕을 옹립한 후 군국 정사를 自任하는 최고실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흥륜사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강조하였다. 흥륜사 승려 진자사와 진지왕이 미륵의 화신인 彌尸郞을 화랑으로 받들었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In the Silla Dynasty, King Jinheung formed the Hwarangdo to prosper the nation. The thoughts that the Hwarangdo were required to learn were called Pungweoldo. Pungweoldo, which included Confucianism, Taoism and Buddhism, was established before 562 when King Jinheung created the Hwarangdo after the official approval from King Beopheung. The training methods of Pungweoldo for the Hwarang were developing morality, enjoying songs and music and sightseeing the landscape. Morality was emphasized in Pungweoldo. Monks in Hwarangdo consistently played a teaching role when the Hwarang developed morality.
Heungnyunsa Temple was the first temple established after Buddhism was approved for the first time. King Jinheung completed building Heungnyunsa Temple and the Maitreya Buddha statue was enshrined in the temple. Maitreya Buddha statue symbolized the aristocrats. As King Jinheung grew up and started to manage the affairs of the state, he pushed ahead with strengthening the royal authority. To that end, the King founded Hwangnyongsa Temple and the Maitreya Buddha statue was enshrined in the temple as the main Buddha statue. The enshrined Maitreya can be considered as the byproduct of a compromise with the aristocrats.
However, King Jinheung selected his eldest son, Dongryoon, as the crown prince and considered himself as cakravartin, promoting the policies to strengthen the royal authority. For that purpose, King Jinheung created the sixteen-foot Buddha statue and the statue was enshrined in Hwangnyongsa Temple as the main Buddha statue. The Sakyamuni Buddha statue symbolized the King. Therefore, the main Buddha statue in Hwangyongsa Temple changed from the Maitreya Buddha statute to the Sakyamuni Buddha statue.
The aristocrats opposed to the King’s policies. One of the representatives of the aristocrats was Geochilbu. He made a huge contribution to expanding the territory of Silla as assistance to the politics of King Jinheung at the beginning. However, he opposed to the policies on strengthening the royal authority, which were promoted by the King in the late period of the reign of the King. Therefore, Geochilbu did not obey the will of the King on the successor after crown prince Dongryoon passed away. It can be considered that the death of King Jinheung after the following year when the sixteen-foot Buddha statue shed tears was the result of the conflicts between King Jinheung and Geochilbu.
Geochilbu became the highest power after enthroning King Jinji. He stressed the Maitreya-faith centering on Heungnyunsa Temple. This was indicated by the fact that Monk Jinjasa from Heungnyunsa Temple and King Jinji accepted the incarnation of Maitreya, Misirang, as a Hw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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