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전쟁과 요서진출연구 = A study on advance for liaoxi and war of Koguryo
저자
발행사항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2009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 2008년 10월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한국어
발행국(도시)
서울
형태사항
ix, 125 p.: 삽도;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 이상선
권말에 참고문헌 수록
권말에 영문초록 수록
소장기관
Ⅰ장에서는 우선 동아시아사에 있어 遼西의 위치를 알아보았다. 즉 중원대륙의 제세력이 요동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땅이 요서지역이었고, 반면 요동의 제세력이 중원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또 거쳐야 하는 곳도 요서였다.
이런 사실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그대로 증명되고 있는데, 前者는 중국의 秦·漢·隋·唐·元 등 통일세력이 요서를 거쳐 요동과 압록강 이남으로 침략해 온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後者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金, 淸 등이 각기 요서로 진출하여 급기야는 금은 淮水以北을 점령하고 청은 중국대륙을 석권하기에 이른 역사가 있다. 더구나 여진족이 세운 금과 청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말갈족의 후예라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요동에 근거지를 둔 세력이 요서로 진출하여 그 세력을 확대하려던 최초의 민족이 바로 고구려라 할 수 있으며, 수·당은 고구려의 이 같은 시도를 좌절시키고자 침략전쟁을 수차례에 걸쳐 일으켰던 것이다. 고구려는 수·당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으나, 요서진출 의도는 후일 요동에 근거를 둔 금과 그를 이은 청이 맥락을 이었다. 결국 역사상 관찰하여 본 요서는 중원대륙의 화북지역과 요하이동의 요동지방을 연결하는 중간지대로 동아시아사에 있어 咽喉地帶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Ⅱ장에서는 稗麗와 관련하여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牛馬群羊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였다.『위서』고구려전에 “토전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업으로 자급자족하기에 부족하였다”라고 하였던 만큼 고구려에서 소, 말, 양 등의 가축은 매우 중요한 자산이었을 것이며,『全唐文』親征高麗手詔에 “소와 양으로 軍食을 충당하였다”라는 기사에서 보듯, 우마군양은 필수적인 군수품이었다고 생각된다.
395년에 광개토왕은 稗麗를 원정하며 내몽골 지방에 진출하였고, 그 결과 수많은 우마군양을 확보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稗麗는 현재 努魯兒虎山 북쪽의 내몽골 일대에서 거주하였던 종족으로 이해된다.
다음 광개토왕비 영락17년조에 대한 것으로, 407년으로부터 이미 10여 년 전에 발생한 參合陂戰을 주목하였다. 북위태조 拓跋珪가 395년 11월에 얼어붙은 黃河를 이용하여 도강하고, 參合陂에서 숙영하고 있던 후연의 모용보군을 급습하여 ‘器甲輜重 軍資雜財十餘萬’이라는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북위는 396년 8월에 보기 40여 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397년 2월 모용보를 패퇴시키고 ‘器仗輜重 數十萬’이라는 노획품을 얻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후연이 북위군에게 약탈당한 ‘器甲輜重 軍資雜財十餘萬計’와 ‘器仗輜重數十萬計’라는 내용으로, 이는 407년조의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와 그 노획상황이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북위의 대후연전에 ‘器甲’과 ‘器仗’이 나오고 또 ‘軍資雜財十餘萬計’라는 표현이, 광개토왕비 407년조의 ‘鎧鉀’과 ‘軍資器械不可稱數’를 서로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검토를 토대로 하면 광개토왕비 407년조가 대후연전이라는 것을 강하게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Ⅲ장에서 436년 2만의 고구려군이 북연국도 화룡에 진출하여 和龍萬戶를 이끌고 고구려 영내로 귀환한 사건을 다루었다. 그리고 479년에 고구려는 유연과 함께 地豆于瓜分을 도모하고 내몽골로 진출하여 거란을 원정하였다. 지두우는 오늘날 大興安嶺 산맥의 인근에서 거주하던 유목민족으로, 고구려가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과분하려 한 것은 유연과 동조하며 북위를 견제하고 물길 등의 세력이 북위와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고구려는 지두우과분 도모를 기회로 莫弗賀勿于 거란을 원정하며 내몽골 지역으로 진출하였는데, 이때 막불하물우는 오늘날 내몽골의 시라무렌하와 노합하가 만나는 곳에 있었다고 보여 진다. 결국 이 같은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장수왕대는 436년 화룡진출과, 479년 지두우과분 도모와 막불하물우 거란원정 등으로 인하여 고구려의 요서진출에 있어 최성기였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한편 고구려의 서방경계와 관련하여『위서』지형지에 나와 있는 영주관할하의 6군과 14현을 검토하여 보았는데, 6군 14현 중에 대릉하의 동쪽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점이다.
『구당서』고려전과『신당서』고려전 기사에서 고구려의 영토가 영주 즉 지금의 朝陽에 ‘至한다’거나 ‘接한다’는 표현도 있고,『독사방여기요』에 나오는 廣寧은 현재 의무려산 동쪽에 있는 北寧으로, 이 지역이 북위 때 고구려에 빼앗겼다는 내용이 나온다.『성경통지』에서는 隋代에 廣寧에서 더 나아가 義州 즉 현재 대릉하 연안의 義縣까지 ‘高句麗地’라고 적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최근 발견된 義縣 고구려금동불상 광배에서 나오는 ‘大高句麗國’이라는 명문을 주목한다면, 북연멸망 이후 고구려의 세력권이 대릉하와 의무려산 동쪽지역까지 확대되었다고 이해된다.
다음으로 Ⅳ장에서는 영양왕이 598년 2월에 말갈기병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요서지역을 선제타격한 사건을 다루었다. 영양왕의 공격을 받자 영주총관 위충이 반격을 가해왔다는 것은 영양왕의 최종 공격목표가 영주총관부일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
이와 관련하여『태평환우기』에서는『尙書』를 인용하여 “碣石山은 곧 하천을 끼고 바다에 처해 있다. 지금 평주의 남쪽 20여 리에 있다. 곧 고구려가 갈석의 좌를 다스렸다”라고 나와 있다.『承德府志』와『欽定熱河志』에는 ‘高麗營’이 보이고 있는데, 高麗營이 난하상류의 한 지류인 伊瑪圖河에 위치하고 있음이 확인되며, 내몽골 시라무렌하의 북쪽에 있는 巴林左翼旗(林東)에 ‘高麗城子’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다. 이상의 ‘碣石’과 ‘高麗營’, ‘高麗城子’에 대한 사실을 검토한다면, 598년에 고구려군이 대릉하를 넘어 난하일대까지 일시적으로 진출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612년과 613년, 614년 등 3차례의 고구려침공에서 수양제의 유일한 성과라는 것은, 武厲邏의 함락과 함께 통정진과 요동군 설치에 있다. 무려라가 436년 고구려군의 화룡진출 이후, 설치되었다면 무려라는 中路에 있게 된다. 즉 북연왕 馮弘은 고구려 영내의 平郭을 거쳐 北豊에 거주하며, 북풍은 395년 광개토왕이 稗麗를 정벌하고 襄平道로 귀환하는 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양평도가 중로라면 무려라도 중로에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태평환우기』기사에서 돌지계가 612년 영주동쪽 2백리의 汝羅故城을 다스린 것이 나와 있는데, 그런 돌지계가 “邊寇侵掠”을 당하여 營州城內에 ‘寄理’하여 여라고성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寄理’는 의탁의 뜻으로 이때 ‘寄理’시점은, 즉 “邊寇侵掠”은 615년의 일에 해당함을 알 수 있고, 대릉하 하류 서안의 여라고성을 공격한 “邊寇”는 고구려로 이해되어 진다.
Ⅴ장을 통해서는 645년 고구려가 당태종의 본격적인 친정에 앞서 당군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선제타격 사건을 다루었다. 그리고 653년에 고구려군의 吐護眞水 진출이 있었다. 토호진수전에서 고구려군은 당의 辛文陵軍이 방비를 하지 않은 틈을 타 습격하였고, 위대가와 설인귀가 신문릉군을 구원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거센 저항을 받아 당군은 크게 고전하였고 위대가는 중상을 입었다.
토호진수는『신당서』지리지에는 “吐護眞河로부터 5백리가면 奚와 거란아장에 이른다”고 되어 있어, 653년에 고구려군이 토호진수 즉 오늘날 내몽골 老哈河에 진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토호진수 주변의 거란과 해 등 유목민족과 연대하여 당의 기미체제하에 있던 영주근방의 송막도독부를 견제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토호진수전의 다음해인 654년 10월에 고구려는 장군 安固를 파견하여 말갈군과 함께 松漠新城을 공격하여, 송막도독 이굴가가 신성에서 대항한다. 이때의 신성은 송막도독 관할지역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때마침 대풍이 일어 고구려는 화살을 쏘아도 바람과 함께 되돌아와 陣中이 어지러웠다”라는 기사에서 신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나온다. 신성의 주인인 송막도독 이굴가가 신성 안에서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고 고구려군은 신성 밖에서 신성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마침 바람이 불어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때 고구려군에 대한 표현이 ‘城中’이 아닌 ‘陣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군이 원정군이었기 때문에 ‘陣中’이라 표현된 것으로 믿어진다.
그런 다음 거란은 들판에 불을 질러 미처 도망가지 못한 고구려 군사들을 불태워 죽이고, 그 시체로 京觀을 쌓았고 이를 당고종에게 보고하였다. 따라서 654년 고구려군이 공격한 신성은 ‘陣中’과 ‘京觀’이라는 주요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내몽골 지역의 송막신성인 것으로 판단된다.
658년 6월에 당의 정명진과 설인귀가 고구려의 赤烽鎭을 공격한 끝에 적봉진이 함락되었다. 고구려가 대장 豆方婁에게 3만의 군사를 보내어 이를 지원하게 하였다는 점은, 적봉진이 고구려의 對唐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서 赤烽鎭의 표기에서 ‘峰’字가 아니고 ‘烽’字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이 점에 관하여 중요한 시사를 준다.『冊府元龜』에 “통정으로부터 요수를 건너 玄菟에 이르렀다”라는 기사에서, 적봉진은 ‘烽’字로서 烽燧기능을 갖춘 고구려의 鎭城이며, 요하 서쪽지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대당전진기지로 오늘날 요녕성 新民縣에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상, 광개토왕대는 요서지역으로의 영향력 확대시기였다면 장수왕대는 요서지역으로의 세력권 확대시기였다고 이해되며, 광개토왕과 장수왕대 요서지역으로의 공세적 진출은 이 시기 중국대륙이 분열되어 있어 가능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隋·唐이라는 통일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수세적 입장으로 바뀐다. 거란이나 奚, 突厥 등을 자파세력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고구려는 수·당과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598년 영양왕의 요서 선제공격이 나온 것이지만, 영양왕의 요서 선제공격은 수문제와 수양제의 고구려침공으로 이어진다.
한편 수가 멸망하고 당이 들어서자 당태종은 630년 동돌궐을 멸망시키며 고구려의 배후세력을 제거하였고, 645년에 돌궐, 거란 등 이민족계 降將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수가 들어선 이후 650년대까지 고구려의 요서진출은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입장에서 요서로 진출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즉 요서진출이 갖는 의미는 고구려의 발전과정에서 각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고구려는 중원세력이 통일되기 전에는 요서로 자유롭게 진출하여 영향력 확대나 세력권 확대를 할 수 있었지만, 중원세력이 통일된 이후에는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요서로 진출하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요서진출은 그 지역 주변의 유목민족을 통제하거나 연계하여 고구려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것이 상실되면 요동의 안위가 위태롭고 요동이 무너지면 압록강 이남의 평양도 안심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서게 된다.
중원의 통일세력과 요동지역의 고구려는 요서지역에서 그들의 생존권을 놓고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가지고 논란을 걸고 있는 중국 측에 고구려의 요서진출이 주는 역사는 당당히 하나의 독립국가임을 웅변하는 논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This thesis starts from the year 650 to the beginning of the Koguryo period through to the war, and is aimmed to explore the advance of Liaoxi of the Koguryo period.
New information in this thesis will be revealed as follows:
First,Ⅰfor the first chapter called Liaoxi, named the administrative section as it first appeared in the Hun biography of Shiji, which was in 311-279 BC. In addition, the emergence of the title Liaoxi than Liaodong later on. Because Liaoxi appears by relativity of Liaodong.
On side, the boundary between Liaoxi and Liodong was Yiwulu Mountain and Dalinghe untill the period of the Later-Han. Since then, Liaoxi hasn't remained the name of an administrative district. However, the concept of nature as the block is continued to this day.
In chapter Ⅱ, this thesis inquired about the conquest of Paeryo in 395 A.D. and the conquest of Later-Yan in 407 A.D. that appeared in Ganggetowangbi. First of all, Ganggetowang conquested Paeryo in 395 A.D. because of obtained flocks of sheep and horses and cattle. It is because livestock was very important property in the society of Koguryo. Paeryo is assumed to be nomadic tribes who raised sheep and horses in a branch stream area and an upper stream area of Jiaolaihe in Liaoxi. Following this, the area of Paeryo was absorbed by the Qidan tribe after the rise of Qidan.
Next, is the text of the 17 year in Ganggetowangbi. This is an article considered by Baekje. But, a partner is distincted in 407 A.D. during the Later-Yan. It was because of an omission by Sagusung, Nusung in Ganggetowangbi and an object of ‘camsaltangjin’ is not able to be Baekje.
And, text of the 17 year in Ganggetowangbi didn't relate the war with Baekje. Because it compared it with a condition of 'hawn' in the text of the 17 year and the 6 year in Ganggetowangbi.
Next, in chapter Ⅲ, this thesis is managed by an event where Jangsuwang sent twenty thousand Koguryo soldiers to the capital of North-Yan in 436 A.D. Here, an important fact was that families of ten thousand of the North-Yan were continued in Koguryo. Therefore, advance to North-Yan by Koguryo soldiers in 436 A.D. is not for the sake of the king of North-Yan.
It was certain that the troops were sent for profit by Koguryo. Since then, Koguryo is recognized by North-Wei to hold possession of the east of Yiwulu Mountain and Dalinghe. It was a cost of the advance went by Koguryo soldier in 436 A.D. Koguryo planned with Rouran for the halve of Didouyu in 479 A.D. And Koguryo was attack in Qidan of Makbulhamulwoo. After, Koguryo advanced to Xilamulunhe.
Between 492-499 A.D. Koguryo once again advanced to Liaoxi. And Koguryo returned at the head of the border with more than 60 people of North-Wei that were pillaged by the Qidan. The cause of the strong Koguryo during the Jangsuwang and Munjamyoungwang age was take possession of the east of Dalinghe henceforth after 436 A.D.
It's evidence that doesn't exist that marks the control of the east of Dalinghe on 6Gun 14Hyun of North-Wei in 444 A.D. Also, a buddhist-sculpture of Koguryo was discovered in Yixian of Liaoxi that affirmed the letter named 'Daekoguryoguk'.
Following this chapter Ⅳ, this thesis inspected the advance of Liaoxi for Koguryo. It was carried out by a war between Koguryo and Sui. That is, Yongyangwang of Koguryo attacked Liaoxi first in 598 A.D. And it is connected with three attacks by Suiwendi and Suiyangdi. In 598 A.D., Suiwendi invaded Koguryo with thirty thousand soldiers.
At this time, Koguryo advanced till Luanhe of Liaoxi by pursuing the soldiers of Sui. The advance to Luanhe of Koguryo connected the third attack of Suiyangdi. Sui obtained only Muryora du
ring the attack of Koguryo in 612 A.D. So far, Muryora has presented a view of xinminxian of the north-road of Liaohe. But, Sui didn't attack the north-road of Liaohe in 612 A.D. Therefore, Muryora didn't exist in xinminxian. Here, Muryora fell by the of the Sui in 612 A.D.
That is, Liaodun saw Caekbuwongwi. Because, the order of invasion of the Koguryo of Tangtaizong is Liahe~Liaodun~Liaze. So, there are the traces of the Muryora.
Chengzigang exists in the place which is 8ri from Liahe. That place is the hilly sections of high in the west and low in the east. Therefore, at a glance, Liahe has a good deal.
In chapter Ⅴ, this thesis inquired about the advance for Liaoxi of Koguryo during the invasion of Tang. That is, advancement of Liaoxi by the Koguryo during the year 650 was the battle of 658 A.D. and the battle of 654 A.D., and the battle of 653 A.D. The battle of 653 A.D. progressed in Laohahe of Inner-Mongolia. The battle of 654 A.D. then progressed in a grassland of the Qidan. Finally, the battle of 658 A.D. progressed in to jeokbongjin of Liaoxi.
The battle of 653 A.D. was assumed to be originated from February to September. The soldiers of the Qidan built the Gyeonggwan in the battle of 654 A.D. This time, Sinsung of the Qidan was restricted by Tang.
Jeokbongjin has existed in Xinminxian. The site of Jeokbongjin is a strategic point and also a plain zone. Therefore, Koguryo regulated the soldiers of Tang who invaded through the north-road of Liaohe.
Also, an area in Jeokbongjin was prepared best by its geographical condition to inform Koguryo-soldiers of the east of Liaohe.
So far, this thesis has inquired about advancement for the Liaoxi by Koguryo. Through it, one can know that Koguryo was controlled by nomadic tribes of the Qidan etc, and Koguryo was possessed east of Dalinghe since 436 A.D.
But through a war with the Tang, Koguryo lost regulation of Qidan and possession of Liaoxi and arrived at a fall. Therefore, through the advancement for Liaoxi by Koguryo, one can learn very important historical 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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