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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허영호의 전쟁 협력의 담록과 근대불교 = 許永鎬の戰爭協力の談論と近代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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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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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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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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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36(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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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호는 부산 동래 출신의 사회운동가, 불교학자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의 생에는 식민지와 분단이 고착화되는 시기를 거쳤던 만큼 시대적 질곡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는 20대 청년기에 지역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동래 지역에서 범어사가 주도한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동래 지역의 사회운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동래청년연맹과 신간회 동래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그는 1926년에 독자적으로 문예지인 『평범』을 창간하여 발행인 및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잡지를 간행한 것은 1920년대에 사회 담론을 주도한 매체로 잡지가 유행하였고, 당시 사회, 문화운동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동래 지역에서 실천적인 사회운동과 함께 개인적으로 전국 판매를 지향한 대중 잡지를 간행한것은 그러한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하지만 허영호 자신의 1인 잡지라는 성격과 제한된 독자층, 그리고 출발부터 드러난 재정난 등이 겹쳐 잡지는 3호로 종간되었다. 이와 같이 잡지 간행이 실패하고, 지역 사회운동이 약화되는 등 사회 실천의 길이 한계를 맞으면서 그는 1929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다이쇼 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유학중에 만당 동경지부에 참여하였고, 귀국 후에는 범어사 출신 승려들과 함께 불교계의 근대화 문제에 앞장섰다. 이후 그는 1933년에 교무원의 주도권 문제로 인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동래로 돌아와 몇 년간은 인자중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에 『불교』지가 속간되면서 그는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약하면서 1945년까지 중앙 불교계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일본의 전쟁에 협력하는 담론을 제시하면서 다양한 "친일" 행적을 남겼다. 해방 이후에 그는 동국대학장으로 선임되었고,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다양한 사회 단체에 참가하였고,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고 1952년에 북한에서 파라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허영호가 제시한 전쟁 협력의 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내선일체론에 입각하여 일본의 동화정책에 추종하는 논리이고, 또 하나는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면서 식민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충동원 담론이다. 전자는 그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국체론을 수용하였으며, 특히 진호국가, 왕버불법론에 입각한 황도불교론을 기본으로 제시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후자는 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총후보국론과 지원병 등의 형태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축구하는 논리로서, 일본의 총력전 수행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런데 허영호의 전쟁 협력 담론은 그 자신이 새롭게 개발한 논리가 아니라 당시 일본의 사상계에서 제시된 담론을 그대로 수용한것이었다. 대표적인 담론이 동아신질서와 동아협동체론이었고, 그것은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면서 대동아신질서의 주창과 대동아공영권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담론은 일본 불교계에도 그대로 수용되었고, 나아가 낡은 근대적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사적 원리를 지도하는 일본정신의 하나로서 불교를 거론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다음으로 허영호의 현실인식이 갖는 문제는 결국 그가 일본 유학을 통해 수용한 근대불교학과 깊이 관련된다. 일본의 근대 불교학은 19세기 유럽에서 언어학, 문헌학적 지식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었다. 아카데미즘 불교학은 연구대상을 텍스트에만 두고, 역사적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현실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반면, 현실의 불교계는 종파와 개조와 전통적 교의에만 관심을 갖게 되어, 양자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게 되었다. 곧 일본 불교는 불교학과 불교계의 분리라고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근대 이후 일본의 불교계가 국가와 타협하고 권력과 결탁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지원하는 방향이나 전쟁에 찬성하는 등 국가불교로의 길로 나아갔던 흐름과 관련된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 불교학을 수용한 이들이 일본불교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허영호의 경우, 그러한 사례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특히 그가 제시한 전쟁 협력의 담론은 근대 일본의 사상계에서 제시된 담론을 토대로 한 것이며, 특히 일본의 근대 불교학이 걸어갔던 경향과 한계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한계는 일본의 불교계보다 봉건적인 유산이 강하고, 식민지라는 현실까지 겹치면서 불교의 근대화 노력이 결코 쉽지 않았던 상황과 관련된다고 하겠다.
더보기許永鏑は釜山の東萊出身の社曾運動家であり、佛敎學者として活動した人物である。彼の生涯は、植民地と分斷が固着される時期を經て時代的な桎梏がそのまま投影されている。彼は20代の靑年期に地域の社曾運動に積極的に參加し樣□な活動をしていたが、東萊地域において梵魚寺主導の3·1運動に參加して監獄される。以後、彼は東萊地域の東萊靑年連盟と新幹曾の東萊支會などに主導的に參加するようになった。反面、彼は1926年に濁自的に文芸誌である『平凡』を創刊し、發行人でありながら編集人としても活動していた。彼が雜誌を刊行したのは1920年代において社曾の談論を主導したメディア雜誌が流行しており、また當時前社會、文化運動の流れの影響を大きく受けたのである。 彼が東萊地域において社會運動であるとともに個人的に全國を對象として販買された大衆雜誌、を刊行したことは意義が少なくない。しかし、許永鎬本人の一人雜誌、という性格とともに制限された讀者層、また出發顯から顯れた財政難などによって雜讀誌は3號で終刊されてしまった。 彼は、雜誌の失敗、地域社曾運動の弱體化などによって社曾的な實踐が出來なくなり、1929年に日本へ留學。東京の大正大學の佛敎學科を卒業した。留學時節に彼は万黨の東京支部に參加し、歸國した後に梵魚寺出身の쾌侶達とともに佛敎界の近代化問題に努力した。その後1933年に敎務院の主導權の問題のせいでソウルから東萊に태ることになり、敷年聞は隱忍自重していた。 ところで、1937年に『佛敎』 誌、が績刊され、彼は發行人及ぴ編集人として活躍し1945年まで中央佛 敎界の主な人物として活動した。そしてかかる時期において彼は日本の 戰爭に協力する談論を提示しながらも樣□な``親日``行績を殘した。解放以後、彼は東國大學の學長に就任、佛敎界を代表する人物として樣□な社曾團體にて參加し、制憲國曾議員として活動した。しかし、彼は次の選擧に落選、1952年に北韓にて波亂万丈な人生が終わるのである。 許永鏑の提示した戰爭に協力する談論は、主に二つである。一つは內鮮一體論によって日本の同化政策に追從する論理であり、もう一つは日本の戰爭が擴大され、植民地朝鮮人を戰爭に動員するための總動員談論である。前者は彼が天皇制イデオロギ一の基礎になる國體論を受け入れており、特に鎭護國家佛敎, 王法佛法論に立つ皇道佛敎論を基本として提示したことからよく現われる。後者は戰爭を後方から支援する銃後報國論と支援兵など 戰爭に積極的に參如することを促がす論理として日本の縮力戰を代弁したのである。 ところで、許永鎬の戰爭に協力する談論は彼が新しく開發した論理ではなく、當時日本の思想界から提示された談論をそのまま受け入れたことであった。その代表的な談論は東亞新秩序と東亞協同體論であって、それは太平洋戰爭へ擴戰されてから大東亞新秩序の主唱と大東亞共榮圈へ擴大された。かかる談論は日本の佛敎界にもそのまま受け入れられており、なお古い近代的秩序を解體して新しい世界史的原理を指導する日本精神の一っとして佛敎を擧論する方向へ進んでいっ たのである。 そしてかかる許永鎬の現實認識がもっ問題点は、結局彼が日本留學を通じて受け入れた近代佛敎學と深く鬪わる。日本の近代佛敎學は19世紀ヨ一ロッパにおいて言語學、文獻學的知識を基盤として形成されたことである。アカデミズン佛敎學は、硏究封象をテキストだけに限定され、歷史的現實に對しては興味を持たかったので現實的に無力な存在になった。これに反して現實の佛敎界は宗派の開祖と傳統的な敎義にだけ興味をもったため、兩者は相對して無關心で、あり、自分の領域だけを護ることになった。卽ち、日本の佛敎は佛敎學と佛敎界の分離という結果になっ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傾向は近代以後日本の佛敎界が國家と妥協し、權力と結託しながら植民地支配を支援する方向へ行っており、戰爭に贊成するなど國家佛敎の道へ進んで、いった流れと鬪わっていく。 從って、植民地朝鮮から日本留學を通じて近代佛敎學を受け入れた僧侶達がかかる日本佛敎の限界から自由になることは難しかったと思われる。許永鎬はそのような事例の代表的な人物であるといえる。彼が提示した戰爭に協力する談論は近代日本の思想界から提示された談論を基盤としたことであり、特に日本の近代佛敎が進んでいった傾向と限界がそのまま反映されている。このような限界は日本の佛敎界より封建的な遺産が强く、植民地という現實にある朝鮮佛敎の近代化の努力が易しくない狀況と鬪わると思わ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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