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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의 상징성과 향교 석전의 식민지적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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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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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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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유교제례인 문묘 석전이 조선총독부의 유림정책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석전을 국가에서 주관했다. 우리나라 문묘에는 우리나라 18현이 중국의 유현들과 함께 석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과 문묘 종사에 주자학의 도통이 강조되었다는 점이 중국과 다르다. 그리고 성균관과 전국 향교에 문묘를 설치하여 국가 차원에서 석전으로 거행한 것은 조선 왕조의 이념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내외에 선언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통감부 시기부터 유림들의 활동 공간인 향교를 통제했다. 강점 직후, 향교가 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의 통제 속에 들어가게 되면서 향교의 기능과 역할에 큰 변화가 있었으며, 더불어 석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 문묘 석전의 주관자인 제관 및 참여자의 변화를 들 수 있으며, 둘째, 석전 제문의 날짜 표기⋅독축(讀祝)방식⋅날짜 변경, 셋째, 양무 및 계성사 향사의 일시적인 폐지, 넷째, 석전의례 중 서고식(誓告式) 추가, 마지막으로 경학원과 향교의 문묘 개방과 일반인 출입의 허용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총독부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유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석전의례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해 온 조선의 유교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자신들의 통치 권력의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석전행사를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경학원 명륜당과 전국 향교를 혼례식장으로까지 개방한 조치는 문묘로 상징되는 조선의 전근대적 사회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신민지 통치를 ‘근대화’로 미화한 것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앞서 총독부는 전국 유림의 동향 파악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석전을 강연회 등 각종 행사와 연계시킴으로서, 식민지 조선인에게 식민통치의 당위성을 선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순종하도록 유도하고, 나아가 일제의 침략 전쟁과 식민통치에 철저하게 이용하였다. 이로서 석전은 기존의 제사로서의 기능이나 신성함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의 적극적인 선전의 장이 되었다.
더보기This study examines how Munmyo (Confucian shrine) Seokjeon was transform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s part of Confucian policies. Findings of this study include the following: Right from the its beginning, the Joseon Dynasty supervised and operated Seokjeon directly. Two major differences between Confucian shrines in Korea and those in China were that 18 major Confucianists in Korea along with those in China were enshrined at Seokjeon and that ideas of Orthodox Neo-Confucianism were emphasized in Confucian shrine affairs. Confucian shrines were built up in various hyanggyos nationwide as well as Seonggyungwan so that rituals were held with Seokjeon on a national level, which represents the ideological nature of the Joseon Dynasty and proclaims the identity of the Joseon Dynasty in and out of the country. Japanese imperialism controlled hyanggyos which were a space of activity for Confucian scholars since the period of the Residency General. Right after the Colonial Period began, hyanggyos were put under the control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and Japanese officials. As a result, there were significant changes in their functions and roles as well as those of Seokjeon. First, there were changes in rite officiants and participants at Confucian shrines of Seokjeon. Second, indication of dates in memorial addresses of Seokjeon, ways of reading addresses, and dates were changed. Third, Yangmu and Gyeseongsa shrines were abolished temporarily. Fourth, an agreement ceremony was added as part of Seokjeon rites. Finally, Gyeonghagwon and hyanggyo shrines were opened to the public. Such changes were intended to imply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valued Confucianism for ‘smooth’ colonial ruling and to emphasize Japan’s present governance while excluding Confucian traditions of Joseon that had long been preserved in Seokjeon rituals. Furthermore, Seokjeon events were opened to the general public, and hyanggyos around the country as well as Gyeonghagwon Pyeongryundang became available as a wedding hall, which was to destroy the premodern social order of Joseon symbolized by Confucian shrines and to beautify the colonial rule as ‘modernization’. Before 1937 when the Chinese-Japanese War broke out,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put forth more efforts to grasp movements of Confucian scholars around the country. Seokjeon was connected to various events such as lecture meeting with the intention of justifying the colonial rule among Koreans and induce them to obey Japan’s rulership, and further, to make full use of Korea for their aggressive wars and colonial rule in other territories. As such, Seokjeon lost its original functions for rituals as well as its divineness completely and rather became a space used by Japan to propagate their war of aggression acti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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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17-12-01 | 평가 |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 KCI후보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1-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0-08-31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태동고전연구 제24집 -> 태동고전연구 | KCI후보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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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52 | 0.52 | 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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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 | 0.66 | 1.754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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