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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초 두아의 ‘大和約’ 주도와 몽골제국 = Du’a’s Promotion of ‘the Great Peace’ in the Early 14th Century and the Mongol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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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환 (경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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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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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was intended to explore the political changes during the early 14th century in Central Asia, especially the process, causes, and results of the decline of the existing Ögödei Ulus and the emergence of Chaghatai Ulus as the new victor. In most previous studies, researchers did not pay attention to the differences between Chaghatai Ulus during which Du’a came to power after Qaidu’s death and Ögödei Ulus during Qaidu’s regime, while they evaluated Chaghatai Ulus at this time as an “ally” or “vassal” of Ögödei Ulus. S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how the circumstances of Chaghatai Ulus from the mid-13th century to the early 14th century, identify the conflicts between Chaghatai Ulus and Ögödei Ulus, present the choices Du’a made to solve this problem and its influence on Chaghatai Ulus and the whole Mongol Empire.
Qaidu, who rose up in opposion to Qubilai, occupied vast domain of Chaghatai Ulus and monopolized the right to reap the tax on the sedentary region in Central Asia. Du’a, who became khan with Qaidu’s help, urgently needed the economic interests from the sedentary region in order to maintain his status as khan. Therefore he was forced to turn his eyes toward the surrounding sedentary areas. In contrast with Qa’an Ulus, which adopted an uncompromising policy in the northwestern region and had little economic attraction as a sedentary region, it was relatively easy to invade Hülegü Ulus, and the border with Hülegü Ulus was a place to advance to Hindustan. However, Qaidu deployed Sarban, his own son, in the upper region of Amu Darya, because he wanted to dominate at the border with Hülegü Ulus. Du’a, because of this, not only suffered a serious loss of military strength, but also had a limited radius of action in that area. Also, he came to be in an inferior situation when it came to the acquisition and distribution of economic interests. Under these circumstances, Qaidu’s death changed the whole situation, and Du’a had to alter his existing stance.
Du’a put a lot of effort to promote ‘the Great Peace’ among Mongol uluses to regain his power. After that, on the basis of Temür Qa’an’s edict, he made an attempt to recover Chaghatai Ulus’s old domain. Also, he forced Chapar, the new khan of Ögödei Ulus, to yield control over Khurasan. This demand naturally brought about Ögödei Ulus’s opposition and Du’a won through a united offense with Qa’an Ulus. Du’a could seize control of Central Asia through an acknowledgment of the authority of the Great Khan.
After all, the territory of Chaghatai Ulus was expanded to Uighuristan, the upper region of Amu Darya and Ghazna. Also, the status of Du’a’s family rose to much greater esteem from his achievements. Furthermore, unlike previous khans in Chaghatai Ulus, every khan after Du’a continuously exchanged envoys with Qa’an Ulus and kept a positive relationship. These comings and goings of envoys involved paying a tribute and giving a reward, the approval of Chaghatai khan’s legitimacy by the Great Khan, and vigorous economic exchanges. In a wider perspective, Du’a’s gaining of power provided the opportunity for the restoration of friendship among the Mongol uluses. The Great Khan’s authority was recovered, although it was limited. Of course there were some conflicts among the uluses, but in comparison with those during Qaidu’s time they lasted for a very short period.
We can find clear differences between the Chaghatai Ulus during which Du’a came to power in Central Asia and the Ögödei Ulus when Qaidu was alive. On this account, the Mongol Empire could shift from a period of division and confrontation to a time of harmony and amity.
뭉케 사후 몽골제국은 큰 혼란을 맞이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릭 부케와의 계승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카안이 되었지만, 우구데이 울루스의 카이두는 그에게 抗拒하였고 차가타이 울루스를 잠식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결국 차가타이 울루스는 그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고, 그는 새로운 차가타이 울루스의 칸으로서 두아를 사실상 임명하였다. 따라서 두아는 전적으로 카이두에 협조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지만, 兩者 간에는 여러 내재된 모순과 대립 가능성이 상존하였다. 비록 이 문제들은 카이두 생전에는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그의 死後에는 본격적인 두 울루스 간의 전면전으로 비화하였다. 本稿에서는 정주지역으로부터 획득하는 경제 이익을 중심으로 양자 간 충돌의 양상과 해결과정, 그리고 그 결과가 차가타이 울루스와 전체 몽골제국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우선 두 울루스가 위치한 중앙아시아 내부 및 인접 정주지역들에 대한 권한이 누구에게 예속되어 있었는지 서술하였다. 카이두는 알구 시기부터 점차 浮上하면서 시르다리야 以東 지역을 차지하였고 바락의 때에는 마와라 안 나흐르의 정주지역에 대한 권한도 일부 확보하였다. 그리고 바락 사후에는 차가타이 울루스 내부의 혼란을 틈타 거의 배타적인 권리를 영유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적어도 차파르의 집권 초까지 계속되었다. 두아와 차가타이 울루스 입장에서는 필요한 정주물자를 확보하고자 위구리스탄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카안 울루스 측의 강경한 방어로 인해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또 훌레구 울루스와 힌두스탄에 대한 원정도 사실상 카이두의 주도 하에 있었으며, 특히 카이두는 자신의 아들 사르반을 아무다리야 상류에 배치하면서 해당 방면의 작전을 총괄하였다. 두아는 난관을 타개하고자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소기의 성과는 얻지 못하였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어서 두아가 카이두 死後에 자신과 차가타이 울루스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살펴보았다. 두아는 칸으로서의 자신의 正統性을 보장받고, 한 울루스의 칸으로서 자신의 권한을 되찾기 위하여 카안과의 和議, 즉 大和約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테무르는 칭기스 칸의 야사를 근거로 두아에게 투르키스탄 일대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였다. 그러나 두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라산과 아무다리야 상류를 차지하여 향후 힌두스탄 등으로의 팽창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두아의 입장 변화는 자연히 우구데이 울루스 측의 반발을 야기하였고,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던 두아는 카안의 도움을 받아 승리를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大和約 이후의 상황들을 서술하였다. 먼저 차가타이 울루스는 우구데이 울루스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와 위구리스탄 및 후라산 일대를 차지하는 등 이전 시기보다 영토가 광범위해졌다. 또 이 과정을 주도한 두아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그의 사후로부터 타르마시린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가타이 울루스의 칸들이 두아의 아들과 손자들 중에서 배출되는 등 두아 一家의 지위가 提高되었다. 그리고 카이두 시기와는 달리 두아 이후 차가타이 울루스 칸들은 카안과 지속적으로 사신을 교환하는 등 友好的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두아가 중앙아시아 일대의 覇權을 장악하고 大和約을 체결하면서 몽 ...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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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2-03-11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TKAFMS -> KAMS | KCI등재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5-02-26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The Korean Association For Mongolian Studies -> TKAFMS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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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37 | 0.37 | 0.3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34 | 0.33 | 0.501 | 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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