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개발'과 전후 '경제협력'에서 일본 기술 컨설턴트의 역할 : 일본공영을 중심으로
저자
발행사항
서울 :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7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석사) --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2017.8
발행연도
2017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발행국(도시)
서울
기타서명
Trans-war history on japanese engineering consultancy : the case of Nippon Koei
형태사항
v, 107 p. : 삽화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임성모
소장기관
Engineering Consultants are those who provide consulting service using their expertise as engineers. The field began to develop before the Asia-Pacific War, based on the US corporate culture. However in Kubota and Sato’s case, a similar professional group existed in pre-war Japan. A prototype of Japanese Engineering Consultant can be found during the 20 years of history of former Nippon Koei(1926~1945). In 1947, after the Asia-Pacific War, these consultants established Nippon Koei in Japan. Nippon Koei took lead in ‘Economic cooperation’ with Asian nations because they were dam engineers which was essential in “nation buliding” of post-war world.
In 1926, Kubota received investment from Nitchitsu and established Joseon Hydropower Company. By developing hydraulic power along the branches of the Yalu river, they could accumulate technological prowess and experience. Also, they cooperated with Japanese machine workshops and engineering companies, which led to their growth. As they were engineers from ‘the empire’, it should be pointed that their progress was enhanced by various special favor provided by Colonial authority. Many of low-wage Korean and chinese workers were sacrificed in Joseon Hydropower Company’s construction site. They carried out national projects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Manchukuo also evaluated highly on their Changjin River Dam development, and made Kubota’s team to attend developing project on Yalu river. As a result, these consultants founded Yalu Hydropower Company to take charge of Yalu development plan.
After 1937, these engineering consultants supported Japan’s total war. Consultants established plans to produce aluminium, which was vital war material. They developed their own skill to build high dam, but through the work of people who were gathered by mobilization orders. Their main argument was ‘reconstruction of Asia by Asian’, which was related to the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As Japanese army extended their territories, consultants were able to expand their business to North China, Hainan island and Southeast asia. They provided developmental strategy for Colonial Joseon, Manchuria and Southeast Asia.
TVA project became strategic model of “New order” under the US initiative. UN and ECAFE also took TVA as a model for “The Third World” development. The US chose Japan as a partner in Asia, and by joining generous ‘San Francisco Peace Treaty’, helped Japan’s economic rehabilitation. Nippon Koei, as a engineering consultancy, already possessed experience and technological prowess of Yalu development, which produced massive electricity similar to TVA. Nippon Koei opened the way for Japanese companies to re-enter Southeast Asia. As a part of war reparation to Burma and South Vietnam and ‘Economic cooperation’ through ECAFE, Nippon Koei established several development plans for Mekong river. Consultants of Nippon Koei believed that they are the experts who could solve North-South divide.
Japanese consultants also participated post-war Korea’s “nation-building”, ‘Gukto Gaebal’. The US saw Japan as a role model for modernizing South Korea. Nippon Koei started ‘economic cooperation’ with South Korea even before the normalization of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Nippon Koei took initiative in Comprehensive Development Projects for Four Major Rivers, which dedicated to application of TVA style development strategy in Korea. Consultants also provided transfer of technique and technique guidance to Korea Engineering Consultants Corp(KECC).. For Park Chung Hee regime, Nippon Koei was an important partner which joined modernization project of Korea. This also, as they did in Joseon, was based on low-wage workers’ hard work.
Like Japanese engineering consultant’s expansion to colonial Joseon and Southeast Asia was related to Imperial Japan’s colonial management and war, their return to Asia during post war period was by the demand of the US to participate TVA style development plan. Japan’s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makes us to criticize social convention that politics and sciences are irrelevant. Post war Japan’s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could not be cut off from ‘dark period’ of prewar colonialism and fascism.
기술 컨설턴트란 기술자 중 자신의 전문성을 활용,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 직종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부터 미국의 기업 문화의 바탕에서 발달했다. 그러나 구보타 유타카(久保田豊)와 사토 도시히코(佐藤時彦)의 사례를 보면, 그와 비슷한 역할을 행했던 직능집단은 전전(戰前) 일본에서도 존재했다. 일본 기술 컨설턴트의 원형은 1926년 설립된 조선수전주식회사부터 장진강수전주식회사, 조선·만주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 일본질소 하이난흥업주식회사 그리고 조선전업주식회사에 이르는 약 20년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1947년 전후 일본에서 그들은 기술 컨설팅 기업 일본공영주식회사를 창립했다. 이후 일본공영은 아시아 제국(諸國)과 ‘경제협력’을 주도했다. 그들이 전후 냉전 질서 하 세계가 “국가 건설”을 위해 필요했던 댐 기술자였기 때문이었다.
구보타는 일본질소의 투자를 받아 1926년 조선수전주식회사를 세웠다. 압록강 지류에 대한 개발 계획을 통해 자신들의 기술력과 경험의 축적은 물론 ‘내지’의 기계제작소 및 토목업계와 협력하며 이들의 성장을 견인했다. 하지만 제국의 기술자로서 식민지에서 누릴 수 있는 각종 특혜가 그들의 기술력 증진을 가속시켰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조선수전의 공사지에서 상당수의 조선인, 중국인 저임금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 이후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전력 운영에 관한 국책을 도왔다. 만주국 측은 장진강 개발이 보여준 성과를 높이 샀고, 압록강 본류에 대한 개발계획에 그들을 동참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기술 컨설턴트는 압록강본류종합개발계획을 담당할 조선·만주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37년 이후 기술 컨설턴트는 제국 일본의 총력전 수행을 보조했다. 압록강본류개발계획을 통해 확보한 안정적인 전력으로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알루미늄 생산에 대한 계획 및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 나아가 ‘남양(南洋)’에 대한 개발 전략을 제시했다. 전시기 그들이 대형 댐 건설 기술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었던 데에는 총동원체제의 동원된 노동력의 희생이 있었다.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와 결부된 ‘아시아인의 아시아 재건설’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군대의 이동과 더불어 사업을 북중국, 하이난도, 동남아시아로 확장할 수 있었다.
TVA 사업은 전후 미국 중심 ‘신질서’의 전략 모델이 되었다. 국제연합과 그 휘하의 ECAFE 또한 “제3세계” 개발의 모델로 TVA를 택했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파트너로 선정했고,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경제 부흥을 촉진시켰다. 전후 기술 컨설팅 기업으로 거듭난 일본공영의 기술진은 이미 TVA와 유사한 발전량(發電量)을 선보였던 압록강본류종합개발계획의 경험과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 기업이 아시아로 재진출하는 길은 일본공영이 열었다. 버마와 남베트남에 대한 ‘배상’에 중요했던 개발 계획과 ECAFE를 통한 ‘경제협력’으로 메콩강종합개발계획의 일부를 완성했다. 기술 컨설턴트는 자신들이 “남북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라고 여겼다.
기술 컨설턴트는 전후 한국 ‘근대화’에서 중시된 ‘국토 개발’에 참여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 전략에서 중요했던 한국의 근대화 모델로 일본을 택했다. 일본공영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부터 한국과 ‘경제협력’에 앞장섰다. 일본공영이 주도했던 한국의 하천 종합개발계획을 통해 한국에 TVA식 개발 전략을 적용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기술 지도와 이전의 의무를 실행, 한국종합기술공사의 성장을 도왔다. 박정희 정권에게 일본공영은 ‘조국 근대화’의 개발계획에 동참해준 중요한 파트너였다. 전후 한국에서도 기술 컨설턴트의 사업은 제 값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노동에 기대있었다.
기술 컨설턴트가 전전과 전시기 식민지 조선과 동남아시아에 진출했던 것이 제국 일본의 식민지 경영 그리고 전쟁과 무관하지 않았듯이 이들의 아시아 복귀 역시 미국의 패권적 요구에 의해 TVA식 개발계획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제국과 식민지라는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권력 관계에서 형성된 기술력은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만들어냈다. 일본의 과학기술사는 정치와 과학기술이 무관한 것처럼 인식하는 사회적 통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전후 일본의 과학기술사는 전전 식민주의와 파시즘의 ‘어두웠던 시기’와 단절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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