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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일본의 ‘정한’ 계획과 동해안 = Japan’s Plan for “Conquest of Korea” and the East Coast of Korea in the 18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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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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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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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872, before the theory of “conquest of Korea” boiled over in Japan, Army General Saigo Takamori was setting up a military operation for “conquest of Korea”. He tried to prevent the outbreak of civil war caused by misgovernment through the “conquest of Korea”. Meanwhile, Foreign Minister Taneomi Soejima, argued for an imperialist “conquest of Korea” theory as part of the conquest of the East and formulated his own “conquest of Korea” strategy. These strategies of Saigo and Soejima were flawed. They did not have information on ports where warships could land in northeastern Korea.
Before this flaw could be overcome, Saigo, Soejima, and the other “conquest of Korea” sect were defeated in a political war. However, Soejima’s ideas for “conquest of Korea” were passed on to Hisato Sewaki, Shigeru Moriyama, and others within the Foreign Ministry. Sewaki attempted to infiltrate northeastern Korea to find a suitable port and investigate the process of using it for military operations, but opposition within the Foreign Ministry prevented him from doing so.
Meanwhile, Moriyama attempted gunboat diplomacy following the example of Admiral Perry of the United States. Captain Yoshika Inoue, the commander of the Unyo warship, was dispatched for this purpose, surveyed the waterways around Busan and the east coast, revealed that warships could enter Yeongheung Bay, and resolved the northeastern port problem. In addition, upon hearing that gunboat diplomacy was not effective in Moriyama, Inoue loaded up with ammunition with the intention of causing an incident, and began investigating the waterways on the south and west coasts of Korea.
Finally, he surveyed the waterways of Ganghwa Island, which he had heard was a fortress, and engaged in an artillery battle with the Korea defenders.
Upon hearing of the Ganghwa Island incident, the Russian Minister, Takeaki Enomoto, regarded it as a “cause for war” and called for the Japanese Government to capture Busan, deliver an ultimatum, march to the capital, and land in Yeongheung Bay to disturb Korea. However, the Japanese government only proceeded with its gunboat diplomacy and concluded the Treaty of Ganghwa Island. Around this time, Enomoto obtained information that Russia was planning to seize Wonsan and informed the Foreign Ministry. The Japanese government insisted on using Yeongheung Bay as an open port to deter Russian expansion, and obtained the consent of the Korean Government, which showed reluctance. Yongheung Bay was an important place in the perspective of military operations for Japan both in terms of “conquest of Korea’’ and international politics.
일본에서 ‘정한’론이 비등하기 전인 1872년 육군대장 사이고 다카모리(西 鄕隆盛)는 ‘정한’의 군사작전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는 실정으로 인한 내란 의발생을 ‘정한’으로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한편,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 (副 島種臣)는 동방 제패의 일환으로 제국주의적 ‘정한’론을 주장하고 독자적인‘정한’ 전략을 세웠다. 이들 사이고와 소에지마의 전략에는 결함이 있었다 .
조선 동북부에서 군함이 입항할 수 있는 항구를 찾을 수 없기에 그 지방 에대한 군사 작전을 세울 수 없었다. 이 결함을 극복하기 전에 사이고, 소에지마 등 ‘정한’파 참의(參議)들은 정쟁에 패해 하야했다. 그러나 소에지마의 ‘정한’ 구상은 외무성 내에서 세와키 히사토(瀬脇壽人),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등에게 이어졌다. 세와키는 조선 동북부에 잠입해 양항을 찾아 군항을 만드는 절차 등을 조사하려 했으나 외무성 내 반대로 그 조사만은 중지되었다.
한편, 모리야마는 미국의 페리 제독을 본받아 포함외교를 시도했다. 이 를위해 파견된 운요(雲揚)함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는 부산과 동해안의 수로를 조사하고 영흥만에 군함이 입항할 수 있음을 실증하여 동북부항만 문제를 해결했다. 게다가 그는 모리야마에게서 포함외교의 효과가 거의 없다는 말을 듣자 사건을 일으킬 생각으로 운요함에 탄약을 가득 실 은후 조선 남해안·서해안의 수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노우에는드디어 요새가 되어 있다고 들었던 강화도의 수로를 측량해 조선수비대와포격전을 벌였다. 이 강화도 사건을 들은 러시아 공사 에노모토 다케아키(榎 本武揚)는 사건을 ‘전쟁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일본이 부산을 점거해 최후통첩을 전해 수도로 진격함과 동시에 영흥만에도 상륙하고 조선을 압복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오로지 포함외교를 진행시켜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이즈음 에노모토는 러시아가 원산의 조차(租借)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외무경에 알렸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남하를 억제하기위해서도 영흥만을 일본에 대한 개항지로 삼을 것을 고집하고 난색을 보 인조선 측에서 동의를 얻었다. 영흥만은 일본에게는 ‘정한’과 국제정치의 양면에서 중요한 항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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