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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과 대각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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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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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1864∼1940)은 19세기 말 일본의 한반도 강점기에 활동했던 불교의 선수행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백용성은 전법의 땅이며 3․1 독립운동의 성지인 대각사를 창건했다. 백용성은 그 암울했던 시대에 한국 전통불교의 중흥과 독립을 위해 크게 노력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동학 민란 및 유교의 쇠퇴로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사회였다. 불교 또한 조선왕조 초기부터 억불숭유 정책으로 극심한 탄압을 받아 왔으며 그 결과 겨우 법통을 이으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출가한 백용성은 전국의 여러 사찰과 선원에서 수행한 후 1911년 서울로 상경하여 한국 전통불교의 중흥과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1916년 백용성은 그의 대각사상과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 그리고 대중포교 활동의 거점이 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봉익동 1번지에 위치한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또한 백용성은 삼장역회를 출범시켜 수많은 역경 사업, 한글 대각교 의식집을 포함한 활발한 저술 활동 등 불교 포교 활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백용성과 대각사 연구를 위해 필자는 세 시기로 구분하여 논지를 전개하였다. 백용성이 상경한 1911년부터 백용성이 3․1 독립운동 민족대표로 옥고를 치르게 되는 1920년까지를 첫 번째 단계로 구분하였다. 1기에서는 대각사의 창건과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대각사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백용성이 경성 감옥에서 출옥한 해이면서 삼장역회를 출범시킨 해인 1921년부터 대각사의 소유권이 범어사로 인계되는 1936년 전해인 1935년까지를 두 번째 시기로 구분하였다. 2기에서는 역경사업과 저술사업의 장, 저항으로서의 대각교 선포의 장, 그리고 대중 포교를 위한 중심이 되는 場으로서 대각사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36년부터 백용성이 입적하는 1940년까지를 마지막 세 번째 시기로 구분하였다. 3기에서는 대각사의 범어사로 소유권 인계, 계속된 번역과 저술사업의 場, 그리고 대각사의 조선불교 선종 총림으로의 전환을 다루었다. 백용성이 한국 불교사에 길이길이 기념되듯이 대각사가 한국불교발전에 끼친 영향도 백용성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더보기Rev. Yongseong Baek(1864∼1940) was a Buddhist monk and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great master built Daegaksa Temple, which would become a mecca for Buddhist teaching and a fulcrum of the March 1st Liberation Movement. In that gloomy period, Yongseong tirelessly strove for the independence and the revival of traditional Korean Buddhism. At that time, Joseon society was in a chaotic and disordered state, largely because of the Donghak Civil War and the decline of Confucianism. Buddhism was also severely oppressed by hegemonic dynastic rule; nevertheless, the religion was strong enough to prevail for monks like Yongseong to succeed to the abbacy. In this social atmosphere, Rev. Yongseong, who had been ordained as a Buddhist monk, moved to Seoul in 1911 after practicing in various temples and meditation halls across the country. It was here in the capital where he devoted himself to the revival of traditional Korean Buddhism and its growing popularization. In 1916, he established Daegaksa Temple, which would not only act as the intellectual hive for his Daegak ideas but also as the center for his national independence and mass proselytization activities. In addition, in 1921, Rev. Yongseong organized the Samjang Translation Society, thus initiating a fully∼fledged translation project that would translate and publish in earnest Buddhist scriptures. The first period was between 1911 and 1920. The great master Yongseong was sentenced to prison for signing the famous March 1st 1919 Declaration of Independence. He was released from Gyeongseong Prison in 1921. The first phase examines the founding of Daegaksa Temple as well as the role the temple would play as center for the Buddhist independence movement. The second period was between 1921, the year in which the Samjang Translation Society was launched, and 1935 when the ownership of Daegaksa Temple was transferred to Beomeosa Temple. In the second phase, I examine the role Daegaksa Temple played as the center of public mission; for instance, as loci of translation and writing projects, of resistance (vis a vis the declaration of Daegakgyo), and of mass proselytization. Finally, the third was between 1936 and 1940 (Rev. Yongseong passed away in 1940). The last phase covers the ownership of Beomeosa Temple, wherefrom he continued his translation and writing projects, including the transition to the Chongrim (a comprehensive monastic training system) promulgated by the Joseon Buddhist seon order. Just as Yongseong is justly celebrated in the annals of Korean Buddhist history, people will likewise remember Daegaksa Temple for its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Korean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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