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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의 생애와 의열투쟁 = Lee, Jong-am’s life and his heroic struggle
저자
이동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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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2
작성언어
Korean
KDC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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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수록면
135-167(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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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은 의열단을 창단하여 줄곧 의열투쟁으로 초지일관한 독립운동가이다. 대구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하던 이종암은 1918년 대구은행 돈 1만 5백 여원을 가지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돈은 이후 의열단 창단과 활동자금으로 쓰이게 된다. 망명 후 이종암은 신흥무관학교를 제2기로 졸업하고 의열단을 창단하고 의열투쟁에 매진하였다.
이종암은 의열단 창단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의열단 창단과 활동을 위한 자금을 제공하였고, 김원봉과 함께 상해로 가서 3개월간 폭탄제조법과 조작법을 배우는 등 의열단 창단을 위해 매진하였다. 이종암은 의열단 의거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1920년 제1차 ‘국내기관 총공격거사’ 당시에는 자금조달 및 연락책 임무를 맡았고, 최수봉의거(밀양경찰서 투탄)를 지원하였으며, 1922년 상해 황포탄의거(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 당시에는 제3선 저격수였고, 1922년 의열단 조직개편 이후에는 5인 기밀부의 일원이었다. 1923년 대규모 광역거사(제3차 폭동계획) 추진 시에는 특파단원으로 선발되었다.
이종암은 당시 의열단 활동이 어려움을 겪게 되고, 사회주의 운동자들이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비난하자 의열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종암은 1925년 신병에도 불구하고 동경거사 준비를 위한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종암은 의열단 단원 11명과 함께 경상남북도 일원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북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종암이 주도한 경북의열단사건이다.
경북의열단사건은 일제가 중대사건으로 규정하고 의열단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1년간 비밀리에 조사하고 신문보도도 통제하였다. 경북의열단사건의 중심인물인 이종암은 재판과정에서 태연하고 당당하게 대구은행에서 가져간 자금과 의열단에서의 활동 등 전부 시인하였다. 이종암은 법정에서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비난하고 “우리 조선이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혁명을 불가불할 수밖에 없지 않소!”라고 일본인 재판장을 질타하며 투쟁하였다. 이종암은 징역 13년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1930년 5월 19일 위장병·인후병·폐병이 위중하여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지 열흘만인 1930년 5월 29일 3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종암은 의열단 창단 이후 체포될 때까지 의거 결행을 위해 6차례에 걸쳐 국내로 잠입하여 최일선에서 활동한 행동파였다. 이종암의 조국 독립을 위한 의지는 의열단 의거로 점철되었고 의열단과 운명을 같이한 진정한 의사였다.
Lee, Jong-am was an independence fighter who organized Euiyeoldan (an armed group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continued heroic struggle from beginning to end. He who joined and worked for Daegu Bank sought refugee in China in 1918 with money of 10,500 won that he embezzled from the bank. This money was used for the establishment of Euiyeoldan and its activity. After he fled Korea, he graduated from Sinheung Military School as one of the second graduates and organized Euiyeoldan, and strove for heroic struggle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Lee, Jong-am played the biggest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Euiyeoldan. Supplying a fund for the establishment and activities of Euiyeoldan and learning the manufacturing and handling technique of a bomb in Shanghai for 3 months with Kim, Won-bong, he strove for the establishment of Euiyeoldan. He planned and led the worthy undertakings of Euiyeoldan. He undertook the fund raising task and liaison mission at the time of the first all-out attack on government agencies in Korea in 1920 and supported Choi, Soo-bong’s heroic deed (throwing bombs at Milyang police station). He participated in the worthy undertaking at Hwangputan(黃浦灘), Shanghai in 1922 as a sniper at the third line. After the organizational change of Euiyeoldan in 1922, he was a member of the secret department which was composed of 5 members. And he was selected as a special member of a large-scale undertaking over a wide area (the third uprising plan) in 1923.
As Euiyeoldan experienced hardships in its activities and socialist activists criticized its line of the struggle, he tried to make a new turning point for heroic struggle. In spite of his illness in 1925, he infiltrated Korea to raise war funds for an uprising in Tokyo. Raising war funds with other 11 members of Euiyeoldan in South and North Gyeongsang Province, Lee, Jong-am was arrested by the North Gyeongsang provincial police of Japanese imperialism. This was the event of Euiyeoldan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led by Lee, Jong-am.
Japanese imperialism regarded it as an event of great consequence and secretly investigated the event for a year to discourage Euiyeoldan and controlled the newspaper reports. Lee, Jong-am, the central figure of the event, admitted money that he embezzled from Daegu Bank and his activities in Euiyeoldan calmly and stately during the trial. He was sentenced to 13 years in jail. As he seriously suffered from a stomach disease, throat disease and lung disease during his being in Daejeon prison, he was released by the stay of execution of the sentence on the 29th of May, 1930. But on the 29th of May, 1930, 10 days after his release, he died for the country. At that time he was 35 years old. He was a man of action who was at the forefront of the struggle and infiltrated Korea for the noble undertakings 6 times from the establishment of Euiyeoldan till his arrest. His willing for the liberation of his homeland was interlaced with the noble undertakings of Euiyeoldan. He was a real righteous man who shared his fate with Euiyeoldan.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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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0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 KCI후보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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