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성금연 명인의 음악활동에 관한 연구 -1955∼1975년을 중심으로- = A Study of Her Musical Activities of Song Kum-yon between 1955-1975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한국음악사학보(Journal of the Society for Korean Historico-Musicology)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6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5-108(104쪽)
KCI 피인용횟수
2
제공처
소장기관
성금연(成錦鳶 1923-1983)은 성금연류 가야금산조의 원류(源流)이고, 현재 명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전통음악 명인들이 그러하듯, 성금연의 활동사에 대한 기록도 대부분 증언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금연 명인은 근대의 손꼽히는 가야금 명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들(신문기사, 음반 등)이 아직 연구되지 못한 채 남아있어 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는데, 이를 통해 근대 가야금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연구 기간은 1955∼1975년으로, 이 시기는 해방이후 음반이 재발매되고 성금연과 관련된 신문기사가 등장하는 시작점이자 1975년 5월 30일 성금연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에서 지정해제 및 하와이로의 이민 등으로 한국에서의 활동이 일단락된 시기로 보아 그 기간을 정하였다. 성금연 명인의 음악활동이 가장 꽃피운 것은 1962∼1972년으로 그가 40대였던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음악가가 2∼30대에 연주자로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내고 4∼50대에 연주자이자 교육가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반면 그의 생애는 한국전쟁, 분단 등의 역사적 격변기와 엮여 40대에 압축적으로 꽃피운다. 즉, 그는 약 10년의 기간 동안 연주자이자 교육가로서 압축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연주자로서 확인된 공연 기사 및 자료는 27건으로 연구된 기간인 1955∼1975년의 공연기사 중 약 73%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 정기연주회」,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정기공연」, 「동아일보 주최 제1∼6회 명창명인대회」, 「제6회 파리예술제」, 「제6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미국순회 및 카네기홀 공연」 등 그녀의 주요한 공연활동 기록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음반 역시 그가 녹음한 `무용곡으로 된 가야금산조와 병주`을 비롯한 주요음반이 모두 이 시기에 녹음된 음반이다. 교육가로서도 1960∼1972년 국악예술학교 가야금 지도, 1964년부터 서라벌 예술대학 강사 및 개인적으로 성금연 가야금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부수적으로 살펴보았던 1955년 이전과 1975년 이후 성금연 명인의 활동을 살펴 성금연의 음악활동을 종합해보면, 성금연은 20대에 (池瑛熙)와 결혼하고 `여성국극동지사`(女性國劇同志社)에서 활동을 시작하다가 30대에 한국전쟁 등으로 연주자로서 공백기를 겪고 40대에 연주자이자 교육가로서 화려하게 꽃피우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한국을 떠나면서 활동을 접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성금연 명인의 객관적인 자료를 밝혀나가면서 기존에 알려진 기록과 다른 점들이 발견되었는데, 가장 먼저 성금연 생년월일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았다. 성금연의 공식적인 생년월일은 제적등본의 기록인 1923년 5월 7일로 보아야하지만, 과거의 기록에서 1921년 4월 1일, 1923년 4월10일, 1923년 8월 5일의 각기 다른 생년월일 기록이 있어 어느 것이 성금연의 실제 생년월일인지 밝힐 수가 없었다. 사사(師事) 기록 역시 현재 최옥삼(崔玉三) · 조명수(曺明洙) · 안기옥(安基玉) · 박상근(朴相根)에게 사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과거의 기록에서 최옥삼에게 사사받은 사실은 확인할 수 없었다. 조명수 · 안기옥은 성금연이 서울로 상경하기 전 사사받고 상경 후에는 박상근에게 사사받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활동기록 중 주요한 사항 중에서도 정확하지 않은 기록이 있었다. `1953년/1960년 서울중앙방송국 강사로 재직`한 기록은 서울중앙방송국(KBS) 국악연구회가 1958년에 개설되었기 때문에 연도상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53년 제83회 전국국악경연대회 가야금 1등상 수상」은 「1958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제83회 탄신일축하행사 중 전국국악경연대회」의 수상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일본과 교류한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참가선수 위안공연」, 「국악교육친선예술제」, 「1970년 일본 EXPO70 참가」 기록은 신문기사 등으로 보도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보다는 개별적인 협회나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악예술학교에서 실제 재직교사 기록이 확인되는 것은 창립 후 2년간이며 이후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1972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관계자로 활동하였다. 이렇듯, 성금연 명인에 관해 수정되어야 할 기록들이 밝혀짐으로써 그녀의 음악활동에 대해 조금 더 정확한 기록을 정리할 수 있었고, 그녀의 10년간 왕성한 활동을 통해 당시 전통음악계의 모습을 유추할 수도 있었다. 앞으로 근대 전통음악의 명인들과 활동에 관한 연구가 더 많아져 현대 전통음악의 발전 방향성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더보기As an initiator of the Song Kum-yon school of kayagum sanjo 伽倻琴散調, Song Kum-yon 成錦鳶(1923-1983) is known as a leading master of kayagum music in modern times. However as is the case with most South Korean traditional music masters, her musical activities have not been formally documented; only oral history has been handed down. Therefore, if the history of Song`s musical activities is reconstruct by objective data, newspaper articles, recordings and more, it will be meaningful for the modern history of South Korean traditional music, especially kayagum music. In 1955, the record labels had begun releasing albums again for the first time since Korean War broke out, and articles about Song appeared in the newspapers. Thus, the period of analysis for the present study begins in 1955 and ends in 1975, because Song immigrated to Hawaii for unknown reason at this time and, thus, withdrew from Cultural Property No.23 (solo kayagum playing and singing by the same artist). Generally, peak of the musician as a player is their 20s∼30s, and in their 40s they are frequently active as educators. However, Song`s peak was her 40s, because the disengagement and Korean War broke out when she in her 30s. Consequently, Song was intensively active as both player and educator in her 40s. During that 10-year period, 75% of articles about her musical activity were published, and her main performances, such as `1st∼6th Contest of Masters organized by Tonga Ilbo` 『東亞日報』, `6th Paris Arts Festival,` Performance at Carnegie Hall Performance at Carnegie Hall & US Tour were given. In addition, her main records, like kayagum for dancing was also released at that time. Moreover, as an educator, she was teaching kayagum in university and at private institutions personally in the 1960s and 70s. After her marriage with Chi Yong-hui 池瑛熙, Song participated in the Yosong kukkuk tongjisa 女性國劇同志社 (Society of Female Kugak Musicians) and toured nationwide with them in her mid-20s; however, for the historical reasons given above she had an interregnum as player during the end of her 20s and in her 30s. As a result, her career peaked in her 40`s; however, in 1975, she suddenly immigrated to Hawaii, in the US, for unknown reasons. As noted earlier, Song`s musical activities are only passed on by oral history. Although that history has been useful to reconstruct Song`s life, that data was incompatible with objective data. First of all, her birthday did not agree with former data and newspaper articles. According to the Family Census Register, her birthday is May 7, 1923, but in articles there were three different dates given. So, it`s impossible to figure out her real birth date. In addition, she was a disciple of Ch`oi Ok-sam 崔玉三, Cho Myong-su 曺明洙, An Ki-ok 安基玉, and Pak Sang-gun 朴相根. However, there is no evidence that she studied under Ch`oi in objective data. There are other points that do not align with the objective data. Served as an instructor at KBS in 1953/1960` was errant in the years it reports, and the record of her `first prize in the 83th Nationwide Korea Music Contest in 1953` is changed to one in the `Nationwide Korea Music contest among the 83th birthday celebrations of President Sungman Rhee [Yi Sung-man 李承晩] in 1958`. Besides, according to former data, Song worked with Japan for the Olympics in 1958 and EXPO 70 in 1970; however, those activities were not reported in the newspaper. It would have been performed personally, not as a formal represent active of the nation. Meanwhile, Song was served in School of Korean Traditional Arts (國樂藝術學校) for 2 years according to a document, but she actually taught as an instructor for about 12 years. Through this research, the musical activities of Song were discerned more concretely, based on objective fact. Moreover, this improves understanding of her musical activities adds to elucidating the development of Korean traditional music in modern times. It is hoped that this work will prompt further research in this area, which would enrich studies of contemporary traditional music.
더보기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1999-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54 | 0.54 | 0.4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45 | 0.42 | 0.963 | 0.12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