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先王同文の治 : 太宰春台と朝鮮通信使 太宰春台와 朝鮮通信使 Dazai Shundai and the Choson Ambassadors = 先王同文의 治
저자
小島康敬 (日本 國際基督敎大學 敎養學部)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151.52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70(70쪽)
제공처
소장기관
이 논문은 江戶中期에 활약했던 일본의 儒敎者 太宰春台에게서 나타나는 유교수용의 특이성을 고찰하고, 그로 말미암은 春台의 고립된 내면 세계의 의식을 해명하는 목적으로 한다.
칼 뢰비트 Karl Lo¨with는 "日本人은 이층집에 산다고 할 수 있는데, 일층에서는 日本的으로 사고하거나 느끼고, 이층에서는 플라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유럽의 학문이 늘어서 있다. 이들 사이를 왕래하는 사다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곧 서양사상을 지식의 차원에서는 열심히 배우면서도 그것을 生活規律이나 세계관, 또는 내면 정신의 깊은 차원으로까지 파고들어 섭취하는 법이 없는, 일본에 있어서의 문화수용의 한 특질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뢰비트의 지적을 江戶期에 있어서의 유교문화의 섭취 방식의 문제에 적용하여 생각해 보는 경우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분명히 유교는 江戶期 학문 내지 사상으로서는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지만, 그것이 내재화되어 유교의 禮文化가 습속의 차원에까지 침투한 적은 없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이 일본의 경우가 조선에 있어의 유교의 수용 방식과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하겠다. 江戶期의 유교의 전개에 있어서 '儒敎의 日本化'는 있을 수 있어도 '日本의 儒敎化'라는 현상이 있었다고 상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일본 사회 전체가 조선의 경우와 같이 유교의 禮敎 질서에 침윤되었던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荻生?徠의 사상에 이끌려서 유교의 본질이 '禮樂' 문화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십분 깨달았던 太宰春台는 유학을 형이상학적 사상의 차원에서의 수용에서 머무르지 않고서 습속·생활습관의 차원으로까지 파고 들어가 이를 남김없이 수용하는 동시에 사상과 생활을 분리시키지 않고서 일치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春台는 주위로부터 고립되어 따돌림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孤立感이 역으로 朝鮮通信使에 대한 열린 사고로 승화되어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春台는 조선통신사 일행과의 필담에서 '先王의 禮樂'에 근거하여 음악을 화제로 삼고 있다. 그에게는 '선왕'이 수립한 '禮樂' 문화의 은택을 동일하게 입고 있는 경우로서의 일종의 同胞意識이 국가 간의 彼我 의식을 초월하여 강하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조선·일본은 '先王同文의 治'의 기반 위에 있었던 것이므로 서로 적대시할 필요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太宰春台의 사고가 도달했던 지점이었던 것이다.
In this paper I look at the particular way the mid Edo period Confucian Dazai Shundai(太宰春臺) responded to Confucianism. In doing so I seek to understand both his social isolation, and the development of his own internal sense of self, in terms of this response. Karl Lo ‥with has suggested that Japanese consciousness is something like a two storey house, where the first storey is the Japanese way of thinking and the second storey contains the Western academic tradition from Plato through to Heidegger. He has wondered "where the stairs are in this house. This is a reflection on how culture is integrated in Japan. It is a criticism of the fact that no matter how advanced the state of Japanese knowledge of Western Thought becomes, it does not sink down into daily practices, ways of thinking, or to a deep spiritual level. If we take comments and apply them to the way Confucian culture was absorbed in Edo period Japan, we can see the same kind of pattern. Of course it is a fact that as academic thought Confucianism flourished during the Edo period. I t is also true, however, that the culture of Rites which existed within Confucianism never permeated to the level of becoming normal practice in Japan. This represents a big difference in the way Confucianism was integrated into Japanese, as opposed to Choson(Korean) society. While the progress of Confucianism in japan during the Edo period can certainly be described as a "Japanization of Confucianism", it is difficult to imagine it being described as a "Confucianization of Japan". Society at large was not effected and changed by the order of the Rites as Choson society had been. In this context, Dazai Shundai, who well understood the emphasis Ogyu Sorai(적화조래)put on the culture of "Rites and Music"(禮樂) as the core of Confucianism, not simply stopping at a metaphysical analysis of Confucianism, rather responded to Confucian teachings relating to practice and custom, and tried to bridge the gap between philosophy and daily life. This is what led to Shundai's is isolation from those around him in Japan, but also conversely, to his openness to and ability to connect with the Choson Ambassadors(朝鮮通信使).
In his correspondence with the Ambassadors Shundai, in connection with discussion on "the Rites and Music of the Ancient Kings", brought up the subject of music. For Shundai the culture of "Rites and Music" devised by the Ancient Sage Kings was a blessing through which both he and the Choson Ambassadors could share the same sense of sympathy, a sense which worked strongly to overcome the sense of "us and them" generated from the fact that they came from different countries. China, Korea and Japan, all being "governed by the same shared culture of the Ancient Kings"(先王同文の治), surely had no reason to see each other as enemies. This was the position Shundai arrived 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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