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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의 왕권강화와 국정운영의 변화에 대하여 - 개로왕의 전제왕권 지향과 좌절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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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5
작성언어
Korean
등재정보
KCI등재후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37-77(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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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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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한성시대 후기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 국력이 쇠퇴하고 귀족세력이 발호하면서 왕권의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정변이 일어나 국왕이 폐위되거나 사망한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다. 개로왕의 부왕이었던 비유왕도 對高句麗戰의 패전책임과 차기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정변에 의하여 희생되었다.<br/>
개로왕은 즉위 후 백제의 대내외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왕권강화와 국정운영의 전면적인 변화를 꾀하였다. 개로왕은 기존의 관등제를 근간으로 활용하면서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의 王ㆍ侯制 및 左ㆍ右賢王制를 수용하여 전제왕권을 지향하는 국정운영을 도모하였다.<br/>
그러나 개로왕이 전제적인 왕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461년 곤지에게 청병사의 역할을 부여하여 왜국으로 파견한 이후였다. 개로왕은 곤지의 渡倭를 계기로 국정을 완전히 장악한 후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어 동요하고 있던 지방통치 분야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개로왕은 담로를 지역별로 묶어 광역단위로 편제한 후 王ㆍ侯를 해당 책임자로 임명하여 지방통치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다. 王ㆍ侯에 제수된 사람들은 중앙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세력 외에도 지방의 영향력 있는 토착세력이 임명되었다. 다만 왕ㆍ후제는 전국의 모든 지방을 대상으로 실시된 것이 아니라, 금강 이남과 노령 이북지역 사이에 국한되었다.<br/>
개로왕은 담로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왕ㆍ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였다. 또한 지역별로 불균등하고 차이가 많았던 조세수취, 역역징발, 군사동원 등에 대하여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여 왕ㆍ후로 하여금 통제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개로왕은 중앙의 귀족세력과 지방 토착세력에 의한 자의적인 對民收奪을 억제하여 編戶小民의 성장을 촉진하였다.<br/>
또한 개로왕은 고구려와의 오랜 전란에 지쳐 있던 백성들의 민생안정을 위하여 전쟁을 자제하고 力役 부담을 줄였다. 개로왕은 국력이 회복되고 정국이 안정되자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 수세에 처한 상태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였다. 개로왕은 469년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 북방에 위치한 청목령까지 진출하여 실지회복을 이루었다. 이 때가 개로왕이 추진한 왕권강화와 실지회복을 위한 노력이 최전성기에 도달한 시기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반격을 개시하여 장기전으로 치닫게 되면서 軍役 부담이 가중되고 가혹한 수탈로 이어져 민생이 파탄되기에 이르렀다. 강력한 왕권에 눌려 있던 귀족세력도 저항을 꾀하여 집권층이 분열되고 국정이 동요하였다.<br/>
개로왕은 민심이 이반되고 귀족세력이 도전하자 왕권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화려한 왕궁과 樓閣ㆍ臺사를 조영하였다. 개로왕의 무리한 토목공사의 추진으로 민심은 더욱 악화되고 백제의 국력은 날로 피폐해졌다. 개로왕의 전제왕권은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기에 앞서 내외적인 모순이 격화되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Baekje declined in late Hanseong(漢城) period because of pressure of the southward advance policy of Goguryeo. At this time, aristocratic forces gained power while kings lost their powers. So King Gaero attempted innovative changes in national administration and reinforcement of royal sovereign power to overcome external and internal crises of Baekje. He established a governing system centering on royal families and reinforced royal guarding systems. Also he excluded aristocratic forces from the center of the sovereignty.<br/>
In the beginning of his enthronement, it was difficult to exercise a strong sovereign power over the overall national administration, but in 461, he could hold real power of the national administration completely through a chance of exiling Gonji from his country.<br/>
King Gaero pursued centralized authoritarian rule by appointing influential aboriginal forces as kings and princes to reorganize Damro system(첨魯制) and complement its limitations. Also, he controlled wars for stabilization of the people's livelihood and reduced tax burdens to recover national power out of long-term depression.<br/>
King Gaero advanced to the northern area of Gaesung(開城) by attacking Goguryeo which was engaged in the southward advance policy. However, as the attack to Goguryeo was longer than planned, the people's livelihood fell to unstability. Also as aristocratic forces resisted against him, the party in power was destroyed and the national administration was unstable again. King Gaero who was against alienation of the people and challenge of aristocratic forces, unreasonably advanced public works such as construction of royal castles and pavilions to maintain the authority and dignity of royal power. As a result, the people's livelihood was seriously worsened and national power gradually declined.<br/>
To make matters worse, when Bukwi(北魏) refused the request to send relieving forces, King Gaero's royal power revealed internal and external conflicts and declined itself before it was destroyed by an attack from Goguryeo.<br/>
King Jangsoo occupied Hansung across the Hantan River with decline of national power and worsening of peoples' livelihood as a momentum. After King Gaero was killed, the capital was transferred to Woongjin(熊津), but when the royal sovereign power declined, aristocratic power gained power again.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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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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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1.11 | 1.11 | 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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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 1.05 | 2.153 | 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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