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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소(聖所)로서 금성당의 문화사적 위상-성저십리 내 금성당의 지리적 의미를 중심으로- = Geumseongdang’s Cultural Historical Status as a Religious Sanctum in the Joseon- Focusing on the Meaning of Geumseongdang's Geographical Position in Seongjeosim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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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아 (한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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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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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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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research has purpose in examining the cultural historical status of Geumseongdang(錦城堂, shrine) in Seongjeosimni(城底十里, areas within 4 killometer radius of old seoul) as a religious sanctum through the meaning of it's geographical position and the relation with Hanyang gut(shamanic ritual of 漢陽) sect.
Geumseongdang is a shrine dedicated to King Sejong's son, Geumseong- daegun(錦城大君). It is widely believed that it was replaced as a sanctum of Geumseongdaegun in the late Joseon Dynasty, formerly a shrine for the god of Geumseong mountain in Naju by Naju maritime forces. During the Joseon Dynasty, Geumseongdang existed in three places: Gupabal (Jingwan-dong), Nodeul (Mangwon-dong), and Gaksimjeol (Wolgye-dong), but only Gupabal's Geumseongdang remains today. Geumseongdang was located in Seongjeosimni, which was considered a sacred place for the royal family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reason for the existence of the Geumseongdang in Seongjeosimni is related to the policy of the state trying to expel the shaman out of the Sadaemun(四大門, four gates). Around the Geumseongdang, the place of death and shaman’s village were commonly located, as well as Hwalinseo(活人署). The place of death means a cemetery, execution site, and crematorium. Shaman worked in Hwalinseo by national policy, and their residential village was formed nearby. In other words, the shaman lived in the periphery of the place of death for the consumers in the four gates and the consumers of the rite of death.
Three sects of Hanyanggut tradition pass down up to this day. Three of the four pupils of the founder shaman, Oh Man-soo, made Gupa Balbon, Nodeulbon, and Gaksimjeolbon, and the other pupil, Lady Yang, built her own tradition on Mt. Deokmul. These three factions are identical to the location of Geumseongdang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possibility cannot be ruled out that the three Geumseongdangs, which were located near the shaman residential village and the place of death, could have been established as the strongholds of the sect due to the eviction outside the four gates. When performing shamanistic rituals, the local deity of the area is first invited and announced. In Hanyang Gut, Geumseongdang is the second most frequently called after Soopuldang. According to the survey in Japanese colonial era, even the area around the Geumseongdang was considered a sacred place. During the Joseon Dynasty, when it was necessary to visit Deokmulsan Mountain in Gaesong, the shaman stopped by Geumseongdang first and headed to Gaesong. Or it is presumed that those who failed to visit Kaesong would have been visited on Geumseongdang instead of Deokmulsan Mountain. It raises the possibility to equate Geumseongdangs and Deokmulsan Mountain, because Lady Yang was sister of the three sects of Hanyanggut. According to the "Gungjung Balgi(宮中件記)" of the late Joseon Dynasty, Geumseongdang was one of the prayer centers for the Byeolgieon, including a regular prayer service to the royal family. As such, Geumseongdang was regarded as a religious sanctuary that had a great influence on both the shaman and the believers within the Seongjeosimni in respect that it was considered sacred including vicinity as a center of shaman and religious place for diverse shamanistic consumers.
본 연구는 조선시대 성저십리 내 금성당의 지리적 의미와 한양굿 유파와의 관련성을 통해 종교적 성소로서 문화사적 위상을 살펴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금성당은 세종대왕의 아들인 금성대군을 모신 당이다. 조선후기 금성대군을 모신 성소로 환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전에는 나주 해상세력에 의해 나주 금성산의 산신을 위한 성소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조선시대 금성당은 구파발(진관동)․노들(망원동)․각심절(월계동) 이 세 곳에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구파발의 금성당 만이 남아있다. 금성당은 조선시대 왕도의 성역으로 여겨지던 성저십리에 존재하였다. 성저십리에 금성당이 존재했던 이유는 국가가 무격을 사대문 밖으로 축출하려했던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금성당 주변으로는 죽음의 공간과 무격거주촌이 공통적으로 위치해 있었으며, 이 외에 활인서가 위치해 있었다. 죽음의 공간은 공동묘지, 사형 집행지, 화장터를 말한다. 무격은 국가정책에 의해 활인서에 근무하였으며, 그 인근에 무격거주촌이 형성되었다. 즉, 무격들은 사대문 안 소비층과 죽음의 공간에서의 죽음의례 소비층을 위해 그 주변부에서 모여 살면서 무업활동을 하였다.
한양굿 세 유파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세 유파는 오만수라는 무조(巫祖) 하의 네 신딸과 관련된다. 이 중 하나는 양씨부인으로 덕물산의 무전통을 세웠고, 다른 세 명의 신딸은 구파발본․노들본․각심절본을 만들었다. 이 세 유파는 조선시대 금성당이 존재하였던 위치와 동일하다. 사대문 밖 축출로 인해 성저십리 주변에 모여 살던 무격에게 죽음의 공간과 무격거주촌 인근에 위치한 세 곳의 금성당은 자연스럽게 유파의 근본이 되는 성소로서 자리매김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속제의를 행할 때는 해당 지역의 지역신을 가장 먼저 초대하여 고하는데, 한양굿에서는 수풀당 다음으로 금성당이 가장 많이 불려진다. 일제강점기 조사에 의하면 민간에서는 해당 금성당 주변까지도 성지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한양굿 무격은 개성의 덕물산에 예탐(豫探)을 하러 가야 할 때는, 먼저 금성당에 들른 뒤에 개성으로 향하였다. 혹은 개성까지 가지 못한 이들은 덕물산을 대신해 금성당에서 예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양굿 세 유파와 덕물산의 양씨 부인이 동기간이라는 점에서 덕물산과 세 곳의 금성당을 동일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해 본다. 또한 조선후기 <궁중발기>에 의하면, 금성당은 왕실에서 정기적으로 시주를 하며 기복발원을 기원하는 등 별기은을 위한 기도처 중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금성당은 무격의 본향임과 동시에 다양한 무속 소비층을 위한 종교공간으로서 그 인근까지도 신성시되었다는 점에서, 성저십리 내에서 무격과 신앙자들 모두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적 성소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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