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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강릉사족의 松潭書院 建立과 栗谷陞廡疏 전개과정 = The movement of Gangneung Sajok(士族) to building Sowon and Enshrine Yulgok(栗谷) in Confucian shrine during 17th Century
저자
임호민 (관동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후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83-217(35쪽)
KCI 피인용횟수
4
제공처
This study is analyzed that Gangneung Saiok enshrine Yulgok(栗谷) in Confucian shrine, building of Songdam sowon(松潭書院) with Yulgok(栗谷), and go ahead plan to gift of signboard from the government in Songdam sowon.
The member of Soin(西人)-western faction- go in for matter of Yulgok's political, academic concern, and scholastic achievements. On the contrary, The member of Dongin's(東人)-eastern faction- come down on Yulgok's activity and track record in connection with a academic and political. They not hold up because of the Yulgok's favorites play, a believer and interest in Buddhism, and rejection of the academic result with Yi Hwang. Injo, Hyojong, Hyonjong and Suckchong in Yi dynasty, They haven't decided whether to enshrine or not enshrine. Because, A clique was extreme between political parts. Consequently, they were cautious about committing himself.
But Yulgok's scholars asked for the enshrine Yulgok(栗谷) in Confucian shrine from Injo coup d'etat(仁祖反正) in 1623. A ultimate conclusion to enshrine Yulgok(栗谷) in Confucian shrine concluded Suckchong King twenty year in 1694. After seventy years of indecision, the government finally gave the enshrine Yulgok(栗谷) in Confucian shrine
But then, Gangneung Sajok(士族) continually pushed ahead with their memorialize the King that were to building Songdam sowon(松潭書院) with Yulgok(栗谷), to gift of signboard from the government in Songdam sowon and to enshrine Yulgok(栗谷) in Confucian shrine. After thirty eight years, Songdam sowon was built in the Gangneung region at Injo King eight in 1630. The signboard of Songdam sowon decided in 1660.
This determination was an important change in the Gangneung local community in the seventeenth Century. The change was following of Yulgok(栗谷) academic. Therefore, after the seventeenth Century. the local community changed from influence of Yongnam to academic traditions of Kiho.
본 논문은 17세기 강릉지방 사족들이 송담서원 건립과 서원의 사액을 위한 상소활동, 그리고 문묘종사를 추진하는 과정 등을 검토한 것이다. 특히 이이에 대한 비난 여론의 쟁점, 인조반정 직후부터 1694년(숙종 20)까지 오랫동안 논의되었던 종향과 출향이라는 순탄하지 않았던 역경을 살펴보았다.
처음 서원 건립을 추진한 시기는 1592년(선조 25)이다. 이때 재지사족들은 이이를 도학의 종장이고 유림의 영수라고 인식하였고, 또 강릉이 그의 출생지라는 연유로 강릉 사람들은 그를 경모와 추앙의 대상으로 받들었다. 이에 그를 추모하고 그의 덕을 높이 받들기 위해 서원 건립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강릉지방 재지사족들은 그를 위한 서원 건립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나 38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서야 확정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던 연유는 우선, 처음 서원 건립을 주도할 당시가 임진왜란이라는 변란이 막 발발하였던 시기로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과 함께 당시 조정에는 이이를 비난하는 정치세력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서원건립이 완공된 것은 1630년(인조 8)이다. 그리고 서원 건립 여부가 결정된 것은 1624년(인조 2)이다. 즉 이 시기는 인조반정으로 조정의 정치세력이 서인중심으로 재편된 때이다. 그리고 당시 강릉부사 역시 이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이었다.
서원건립이 성사된 직후인 1630년(인조 8) 강릉부 유생 崔彦琛 등은 서원의 경제력 향상과 위상 강화를 위해 조정에 사액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 때 강릉 사족들은 해주 석담서원은 이이가 중년에 퇴거하여 머물던 곳이고 이곳 강릉은 그의 태어나 자란 곳이므로 석담과 같이 사액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1660년(현종 1) 결정되었다.
인조 이후 역대 왕들은 율곡종향에 있어서 신중론을 펼쳤는데, 그 까닭은 그를 비방하는 많은 흡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향을 논의할 때마다 붕당으로 조정이 혼란하고 편당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신중론을 펼쳤던 것이다. 즉 정국 안정을 위함이었다. 이점은 숙종조의 예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숙종은 자신의 권력 안정과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환국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활용하였고, 그 때 마다 제기되었던 종향과 출향을 번복하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17세기 강릉지방 재지사족들이 추진하였던, 서원 건립, 서원의 이건, 서원의 사액 추진, 그리고 중앙과 외방에서 전개되었던 牛栗陞廡疏는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 희비가 엇갈렸다. 그러나 강릉지방 재지사족들은 이이를 추존하는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강한 결속을 보였고,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17세기 강릉 지역사회는 율곡의 학풍 따르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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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후보 |
201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 KCI후보 |
2011-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2010-06-23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율곡사상연구 -> 율곡학연구외국어명 : 미등록 -> JOURNAL OF YULGOK-STUDIES | KCI후보 |
2010-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57 | 0.57 | 0.55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49 | 0.47 | 1.667 | 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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