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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泰元의 學問과 思想에 대한 一考察 = A Study on Jung Tae-won's learning and thought
저자
張炳漢 (靈山大學校 建築學部)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4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151.52
등재정보
KCI등재후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23-162(40쪽)
KCI 피인용횟수
1
제공처
소장기관
지금까지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雙州 鄭泰元(1824, 순조 24- 1880, 고종 17)은 영남 진주에 거주하면서 대체로 栗谷과 尤菴의 학문과 인격을 존모하면서 기호학파의 학맥을 계승하였고 평생 衛正斥邪와 尊華攘夷의 이념을 고집하여 실천하였다. 그는 당시 老論의 宗匠이었던 梅山 洪直弼(영조 52, 1776- 철종 3년, 1852)의 문하에서 師事하였지만 그렇게 크게 벼슬에 있어 출세를 하지 못한 형편 이었으며 다만 1879년(고종 16) 부친 西湖公의 遺命에 따라 56세의 老年으로 司馬試에 합격하여 士林들로부터 많이 羨望한 바 되어 촉곤 趙羲贊등의 추천을 받기도 하였으나 끝내 要路에 등용되지 못한 채 57세(1880)를 一期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당시 文詞에 있어 '鳴國之手'가 되겠다는 칭찬을 들을 만큼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으며, 당시 교유한 문사로서는 많은 族叔·族兄·族弟를 비롯하여 100여명의 학자가 있었는데, 특히 족형인 芝窩 鄭奎元과는 同堂講學하며 시절탁마한 사이였으며, 艮齋 田愚(1842-1922)의 스승이었던 鼓山 任憲晦와는 같은 梅山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편지왕래와 직접 방문을 통해 깊이 있는 학문적 토론을 가지기도 하였다. 또 그는 '효'의 정신과 숭조의식에 투철하여 이를 향토·국토애로 승화 발전시켜 민족적 자부심과 자아의식으로 구체화하여 문명의 기운이 중국으로부터 동방의 우리나라에 도래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요컨대 쌍주는 영남 진주에 거주하면서 학맥은 대체로 金昌集, 李縡, 金元行, 朴胤源, 洪直弼로 이어지는 노론 낙론게에 속해 있고, '直=內修'의 도맥은 공자-주자-송시열-매산 홍직필에 연결되어 있으며 理氣論의 사상적 도맥은 율곡-송시열에 접맥되어 있지만 '道心'의 개념 정의와 관련해서는 일부 율곡의 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內修外攘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主理적 이념을 기초로 하는 같은 기호학파내의 衛正斥邪論과 尊華攘夷論에 기초하고 있지만 畿湖지방의 華西 李恒老(1792-1868), 湖南의 蘆沙 奇正鎭(1798-1879), 嶺南의 寒洲 李震相(1818-1886) 등과 같이 학파적 차원 또는 집단적 그룹차원에서의 구체적이고 계획적인 대응을 하는데 까지는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지식인 유생들과 함께 만동묘 복설과 華陽書院 복원에 관한 상소를 올리는 등의 현실적 실천을 전개하였다는 것과 경세론과 관련해서는 주자-율곡의 公道論的 사상에 기초한 「삼정구폐소」를 올리는 정도의 현실개혁적 의지를 피력하였다는 데서 그의 학문사상의 역사적 의의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Ssangju Jung Tae-won(1824-1880), who has not been known before the academic world, succeeded Kiho school and practiced his strong conviction that was weizhengchixie(衛正斥邪) and zunhuarangyi(尊華攘夷) through a whole life respecting Yulgok and Wooam's learning and characters in Jinju, Youngnam province. Even though studied under Maesan Hong Jick-pil(1776-1852) who was the head of Noron(老論), he didn't have great success in rank and he was 56 years old when managed to pass Sama Examination(司馬試) in 1879 following his father's last words. After that he was looked enviously by Neo-Confucianism scholars(士林) and was recommended by Chockgon Jo Hui-chan. He had, however, never been in a high position and then passed away in 1880.
He had a great academic talent in phraseology. Among around 100 scholar he sassociated with including, especially with Jiwa Jung Kyu-won, he taught with and kept a close relationship., he studied under Maesan and had academic debates with Gosan Im Hun-hoi, a teacher of Ganjae Jeon Woo(1842-1922). Beside, with filial piety and worship ancestors, he concretised it into love for his native place and nation. These consciousness was embodied into national self-conceit and self-awareness, thus he thought the time of civilisation was coming from China to Korea
In short, Ssangju was associated in Noron Nakron school, linked from Kim Chang-jib, Lee Jae, Kim Won-haeng, Park Yun-won and Hong Jik-pil. Though conneted with Confucious-Zhuzi-Song Si-yul-Maesan Hong Jik-pi1 in thought line of 'zhi(直)=nei ziu(內修)' and conneted with Yulgok-Song Si-yul in the thought line of Liqi theory, he raised a question on definition 'dao xin(道心)' notion to Yulgok's view. On the matter of 'neixiuwairang( 內修外攘)' although he based on weizhengchixie(衛正斥邪) and zunhuarangyi(尊華攘夷) theories, which had the same thougth of Kiho school, concentrating on li, he couldn't developed detailed plan in the dimension of a school or group like Hwaseo Lee Hang-no(l792-1868) in Kiho province, Nosa Ki Jung-sin(1798-1879) in Honam Province or Hanju Lee Jin-sang(1818-1886) in Youngnam Province. We can merely watch the historical meaning of his study from the fact that he voiced an opinion to reform a society such as presenting a memorial to the king on Mandongmyo Boksul(萬東廟復設) and a restoration of Hwayangseowon(華陽書院), and presenting Smjunggupyeso for governing, which based on Zhuzi-Yulgok's gong dao(公道) theory with a party of scholars, centered in Jinju.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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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6-05-15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남명학연구소 -> 경남문화연구원영문명 : The Nammyonghak Study Institute -> Institute of Gyeongnam Culture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66 | 0.66 | 0.53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2 | 0.5 | 0.98 | 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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