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18~19세기 族譜를 통해 본 大丘徐氏 동족집단의 구성 = Composition of the Daegu Seo Clan through genealogy from the 18th to the 19th century
저자
유수지 (-)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451-480(30쪽)
제공처
Daegu Seo Clan was active in the center throughout the Joseon Dynasty. However, their genealogy was published in the early 18th century. Daegu Seo first published "Daegu Seo Clan Sebo" in 1702, and then published a total of five copies until 1852, the mid-19th century.
This paper analyzed the Daegu Seo clan group described in the preface and introductory remarks of the Daegu Seo clan from 1702 to 1852, and examined the composition of the clan group from the 18th to the 19th century. However, the Daegu Seo clan at this time was limited to the Daegu Seo clan, based in Seoul. This is to prevent confusion with Dalseong Seo, who is recognized as the same clan.
Daegu Seo clan tried to distinguish itself from the Dalseong Seo clan through a genealogy in 1702. For this reason, Dalseong Seo was excluded from the main report of the genealogy and recorded as a separate report for the historical fact. Later, in 1775, they were moved back to Bonbo from Eulmibo, but the degree of description of Dalseong Seo Clan was the same as Imobo. Although the Dalseong Seo clan group was recognized as a kinship, the Daegu Seo clan tried to organize the mainstream kinship group embodied in the genealogy only with Gyeongpa with Seo-han as its founder.
However, not all Daegu Seo Clan was published in the Daegu Seo Clan Sebo. In the genealogy, the Daegu Seo clan continued to mention the prosperity of the family of Seo-seong and his sons. Seo-seong and his descendants were those who had a marriage relationship with the royal family, produced government officials continuously, and had a higher social and political status than other Daegu Seo Clan at the time. In other words, the Daegu Seo Clan tried to show the social and political status of the Daegu Seo Clan by using them as the mainstream of the Daegu Seo Clan Sebo.
This was particularly noticeable in Eulmibo, the most complete genealogy. In Eulmibo, unlike before, the distinction between grandchildren and sons-in-law was clarified to emphasize the four households under Seoseong. It was not until the late 18th century that the construction of a genealogy centered on paternal blood ties was attempted. However, it did not completely exclude grandchildren and sons-in-law. This is because they still acted as beings that could represent relationships with other clan groups.
On the other hand, the genealogy report centered on four households under Seo Seong led to the exclusion of descendants of the same Daegu Seo Clan in the mid-19th century. They were the descendants of Bokgyeong, who were excluded because the genealogy was not clear and wrote a separate paper. However, in fact, it is believed that this is because they were descendants of the Seo Geo-jeong family, unlike the four households under Seo-seong, the Seo Geo-gwang family. As such, Daegu Seo tried to maintain a genealogy centered on certain households until the 19th century, and a more expanded form centered on paternal blood ties did not take place until the 20th century.
대구서씨는 조선 전 시기를 통틀어 중앙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巨姓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족보는 18세기 초반에서야 비로소 작성되었다. 대구서씨는 1702년 첫 『大丘徐氏世譜』를 간행한 이후 19세기 중반인 1852년까지 총 5권의 세보를 간행하였다.
본고는 1702년부터 1852년까지 『대구서씨세보』의 서ㆍ발문과 범례에 서술된 대구서씨 동족집단을 분석하여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들이 나타내고자 했던 동족집단의 구성을 살펴보았다. 단, 이때의 대구서씨는 徐閈을 시조로 하는 京派인 대구서씨로 한정하였다. 같은 성관으로 인식되고 있는 鄕派인 달성서씨와의 혼동을 막기 위해서이다.
대구서씨는 1702년 족보인 『임오보』부터 향파인 달성서씨와 구분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그 역사적 사실을 이유로 향파인 달성서씨를 족보의 본보에서 배제하여 별보로 기재하였다. 이후 1775년 『을미보』에서 이들을 다시 본보로 옮겼지만, 향파인 달성서씨 인물들의 기재 정도는 『임오보』와 같았다. 달성서씨 향파를 동족으로는 인식하였지만, 대구서씨는 족보에서 구현되는 주류의 동족집단은 서한을 시조로 둔 경파만으로 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경파인 대구서씨가 『대구서씨세보』에 실린 것은 아니었다. 대구서씨는 족보에서 서성과 그 이하 아들 가계의 번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였다. 서성과 그 이하의 후손들은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고 꾸준하게 관직자들을 배출하며 다른 대구서씨 가계 보다 당대 사회적ㆍ정치적으로 위상이 높은 이들이었다. 즉 대구서씨는 이들을 『대구서씨세보』의 주류로 하여 사회적ㆍ정치적 위상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는 특히 족보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을미보』에서 두드러졌다. 『을미보』에서는 서성 이하 네 가계를 강조하기 위해 기재상 이전과는 달리 외손 및 사위와의 구분을 명확히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부계혈연 중심의 족보 구성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외손 및 사위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이들은 타성들과의 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존재로 여전히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성 이하 네 가계 중심의 족보 수보는 19세기 중반 같은 대구서씨 후손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바로 福慶 이하 자손들로, 이들은 계보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배제되어 따로 파보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들은 서거광 계열인 서성 이하 네 가계들과는 다르게 서거정 계열의 후손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대구서씨는 19세기에 이르러서도 특정 가계를 중심으로 한 수보 형식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좀 더 확장된 형태의 부계혈연 중심의 동족집단화는 20세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