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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세종의 한 면모 = ‘수령육기제’ 도입과 제도화 과정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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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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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우리에게 조선 초기 군주, 세종(世宗)의 정치적 역랑은 문회(한글창제)와 과학(농업 및 측량기구)의 측면에서 강조되었지만, 현실정치가로서의 면모는 경시되었다. 이에 본고는 세종의 정치가적 면모를 지방수령의 ‘6년 임기제’, 즉 수령육기제(守令六期制)의 도입과 그 제도화과정을 통해 살펴본다.
수령 육기제도의 도입은 세종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추진되었다 신하들, 특히 지방수령들의 강력하고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경사(經史)를 통해 확인된 정책일 경우, 공론을 거스르면서도 끝까지 추진하여 제도화시키는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 ‘본론’에서는 그 정착과정을 크게 3단계로 나눠 살펴본다.
(1) 초창기(세종7년~8년) : 세종 7년 2월, 임금이 육기제의 정착을 선언하는 가운데 그 보완책을 신료들에게 요구하면서 시작된 논쟁의 특정은 신하들이 원론적 수준에서 비판하고 군주 역시 교과서적 차원에서 반응하는, 이른바 논전의 서론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신하들의 수령육기제 비판은, 첫째 역사적 근거(經學/史學)가 없고, 둘째 중국의 사례(元六典)와 선왕의 사례(태조ㆍ태종)에도 걸맞지 않으며, 셋째 관료들의 입장에서 문제점이 있고(내직과 외직의 승진기회의 차등), 넷째 관리대상인 지방민의 입장에도 문제가 있다(6년은 긴 기간이어서, 또 현재 수령의 자질상 도리어 악정이 유발)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종은 첫째, 육기제가 수령의 빈번한 교체로 인한 업무연속성의 문제와 또 백성들에게 폐를 끼지는 영송(迎送)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 정책임을 환기시키고, 둘째 이념적 차원에서 육기제의 폐해에 대한 경학적 근거를 대보라고 신료들에게 거꾸로 힐문한다.
(2) 중반기(세종9년~13년) : 세종13년, 봄ㆍ가을에 걸쳐 육기제에 관한 중요한 비판이 제기된다. 유생, 오흠로의 상소문과 사간원에서 제출된 소장이다. 오흠로의 상소문은 관료들(또는 관료예비군)의 입장을 망라한 가장 치밀한 육기제 비판이다. 한편 사간원 소장은 그간 불만으로 잠복해있던 육기제 문제가 정치적 차원으로 확산하는 계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비판을 계기로 의정부 대신들 사이에 파쟁이 발생하고, 6년제 추진파인 허조ㆍ황희를 중심으로 한 ‘친정책파’와 맹사성을 필두로 한 ‘반정책파’로 나뉜다.
세종이 그 시행 상 개선책을 받아들이고 있음이 눈에 띈다. 즉 세종13년 그는 집현전에 명령하여 고전연구(文獻通考/通典)를 통한 육기제 개선책을 지시한다. 그 결과 “내-외관 순환근무제”라는 개선책을 통해 지방직과 경관직을 승진 상 동등하게 대우함으로써 불만을 해소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특별히 개선책의 근거를 고전연구를 통해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3) 후반기 (세종 14년~말년) :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사건은 호조참판, 고약해와 세종간의 쟁론이다. 이 쟁론을 통해 세종은 관료들이 사익 때문에 국가정책의 공공성을 도외시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공익 대 사익’의 대결구도는 맹자로부터 연면한 경학적 테마다. 이 이원적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이후 육기제 비판은 곧 사익을 추구하는 모리배로 몰리게 된다. 고약해 사건 이후 강력한 육기제 비판이 사라진 것도 이 구도를 세종이 정치적으로 장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육기제는 완전히 제도화되고, 그 후 조선후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된다.
(4) 정치가 세종의 리더십의 특정 : 육기제 도입과 제도화과정에서 나타난 정치가 세종의 리더십 근원은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정치적 해석능력’이다. 첫째, 세종은 육기제를 경사(經史) 연구를 통해 다양한 사례를 확인하였다. 즉 유교경전과 역사서에 대한 깊은 독서(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당시 조선의 정황에 걸맞게 정치적으로 해석해냄으로써 구체적 전략으로 형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세종의 독단, 또는 정책시행을 위한 설득의 힘은 ‘학문연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러나 세종의 학문인식은 텍스트(經史)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 현실정치를 중심에 놓고 문제해결 방편을 찾는, 실용적 차원에서 접근한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경전과 역사서를 그 자체 진리의 현현으로 절대화하지 않았고,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상대적 도구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이점은 곧 그가 디디고 서 있는 현실세계를 중심에 놓고, 또 과거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미래를 과제로 삼는 주체적이고 능동적 자세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의 정치가로서의 시공간 감각이라고 판단된다. 요컨대 그는 ‘정치기(君主)’란 역사연구라는 나침반에 의지하여 국가를 끌어가는 ‘선장’과 같은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The specifics of Sejong's thoughts are evidenced in a number of literary records and books. This article will therefore focus on the process of how he enforced and institutionalized suryung yukgije(守令六期制), the six-year term scheme, which was suggested as part of the policy regarding the long-term duty of chief magistrates.
The resistance of anti-yukgije group can be divided into three types according to the period of opposition. In the early stage, they criticized the scheme based on the justification of tradition and custom called seonwangjije(先王之制), the institutions of the late king. They argued that one, the new policy was against the public opinion of the time, and two, that there was no similar example shown in the study of the Classics. In the middle and final period, most criticisms were based on empirical examples, as they claimed that yukgije was not a timely institution. These opinions on empirical examples and untimeliness of the scheme were the views of bureaucrats, especially the local ones.
Sejong first of all argued against the idea that there was a right time for traditions to be reformed. He then tried to persuade the bureaucrats by emphasizing that the scheme was to solve the practical issues of three- year-term and the complexities of reception and farewell of local officials. Thirdly, he deconstructed the meaning of tradition based on his extensive knowledge on the history of the Classics. Fourthly, he exposed the desire that was hidden behind what was called a public opinion and showed that it was merely an assemblage of self-interest, thus deconstructing the meaning of public opinion. All these aspects were apparent in Ko Yak-hae s incident.
Sejong's arbitrary decision, or the power to persuade in order to enforce a policy seems to have come from his academic research. In other words, his leadership was based on the study of Confucian texts. Confucian texts were like identity certificate that ensures political justification a Confucian nation tries to establish. In this aspect, Mote's suggestion that "what God's prophesy did in the West, history did in the East" helps highlight the political significance of Sejong's academic research. Political justification of a Confucian country ultimately boils down to a logical struggle on the Classics and historical examples, and Sejong's research and understanding of the text and its analysis were political actions in themselves. Therefore, his academic research shows that he was being faithful to the role of a monarch who had the responsibility to preserve the identity of a Confucian nation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Classics.
As plainly shown in the case of suryeong yukgije, by providing historical origin and examples of it, he was able to isolate the opposition, and by thrusting the criterion of "public vs. individual interest" in the Classics, he was able to expand the range of his political action. At the same time, we must not neglect the fact that rather than being buried within the text itself, Sejoog s academic awareness placed political reality of the time at the center, and approached it at a practical level as a means to solve problems. He did not absolutize the Classics and historical books as the actualization of truth, but instead knew how to use them relatively according to political needs. This also means that he had an independent and active stance that stood on reality without being buried in the past or taking future as a task. This was, I believe, his spatial and temporal perception as a state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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