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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海 安秉宅과 제주 蘆沙學派에 대한 小考 = A Study on Boohae Ahn Byung-Taek and Nosa School of 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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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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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부해 안병택을 중심으로 제주 노사학파의 형성과 그 성격을 고찰하였다. 조선말기에서 일제강점기의 기간 동안, 제주도에는 노사학파ㆍ화서학파ㆍ간재학파의 인물과 문집이 확인된다. 그 흔적은 신촌에 있는 매계 이한우 유허비에서부터 시작된다. 매계의 문하에는 노사학파를 배웠던 소백 안달삼ㆍ이락당 이계징, 화서학파를 배웠던 해은 김희정이 보인다. 김희정은 제주유배를 왔던 최익현을 통해 화서학파와 연결되었다. 안달삼과 이계징은 본토에 있던 노사 기정진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노사학파와 화서학파의 교유가 제주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조선후기 학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이다.
안달삼과 이계징에서 시작된 노사학파는 부해 안병택에 이르러 크게 확대되었다. 부해 안병택은 제주에서 본토로 이주하였고, 전라도 지역에서 활발한 교학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부해의 제자는 크게 본토의 제자와 제주도의 제자로 나눌 수 있다. 부해의 제자가 많았다고 하지만 『노사연원록』에는 40여 명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 제주도 인물은 아무도 없다. 이에 본고에서는 『부해문집』을 통해 부해의 본토 제자와 제주 제자를 다시 정리하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노사 기정진-송사 기우만-부해 안병택’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부해의 제주 제자들은 대부분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이들 그룹에서 가장 먼저 확인되는 것은 항일의지였다. 처음에는 무력투쟁을 벌였지만,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일제의 억압으로 文鬪로 전환하게 된다. 이들은 역사서 등의 책을 저술하면서 훌륭했던 문화를 후배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조천만세운동은 제주 노사학파와 화서학파의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었다. 제주 항일운동의 과정에서 제주유림들의 역할을 확인한 점도 의미가 있었다.
본토에서는 간재학파와의 사상적 갈등이 있었지만, 제주도에서는 이런 모습은 없다. 오히려 서로 가까이 지냈다. 이들은 제주사회의 리더로서 사회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4.3사건에 대한 이들의 시각은 지금도 주목된다. 이렇게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중심에 부해 안병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examined the formation and the characters of Jeju Nosa School. There have been found in Jeju Island the figures of Nosa School, Hwaseo School, Khanjae School and their works during the periods from the last years of Chosun Dynasty to the years of Japanese Occupation. Their heritages are traced to the memorial stone of Maegye Lee Han-Woo. Pupils of Maegye seem to be Sobaek Ahn Dal-Sam, Yirakdang Lee Gye-Jing who studied Nosh School and Haeun Kim Hee-Jung who studied Hwaseo School. Kim Hee-Jung was connected to Hwaseo School though Choi Yik-Hyun who was then on exile in Jeju. Ahn Dal-Sam sought for learning by visiting Nosa Ki Chung-Jin in the mainland. The academic exchanges between Nosa School and Hwaseo School began in Jeju, which is a meaningful event in academic history of the last years of Chosun Dynasty.
Nosa School whose beginning was made by Ahn Dal-Sam and Lee Gye-Jing developed significantly under the leadership of Boohae Ahn Byung-Taek. Boohae Ahn Byung-Taek moved to the mainland and did an extensive activity of teaching and learning. Boohae had his pupils both in the mainland and Jeju Island. Even though it was said that Boohae had a number of pupils, only 40 members were identified in 『Nosayeounwonrok』 in which no single person was identified to come from Jeju. In this reason, I reorganized Boohae’s pupils from the mainland and those from Jeju Island drawing upon the collection of Boohae’s works. These pupils are those who succeed the lines of Nosa Ki Chung-Jin, Songsa Ki Woo-Man and Boohae Ahn Byung-Taek.
Most of Boohae’s pupils returned to Jeju. The very frist common character that comes through them is a strongly willed mind against Japanese Occupation. At first, they undertook a physically violent fight, which ended in a failure. Afterwards, they turned to fight through writing literary works due to the pressure of Japanese rule. They sought to transfer Korea’s wonderful culture to their academic descendents by writing historical books. Chocheon uprising movement can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 heritages of Nosa School and Hwaseo School in Jeju. I consider that my work is important in that it identifies the roles of confucian scholars in Jeju in the process of Jeju movement against Japan’s Occupation.
It was observed that Nosa and Hwaseo Schools had an ideological struggle with Khanjae school in the mainland. However it did not happen in Jeju; rather, they got along well. As a leader of Jeju society, they expressed their own ideas about society. Their perspectives of the Jeju April 3 Incident are still worthwhile to pay attention. We should remember that the leadership of Boohae Ahn Byung-Taek played a significant role to maintain the harmonious relationships among the members of the three Schools in Jeju.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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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36 | 0.36 | 0.35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37 | 0.36 | 0.746 | 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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