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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지정학 = 대한제국(1897-1910) 시기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과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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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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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6(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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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그의 청년시절인 대한제국 시기에 가졌던 지정학적 인식을 독립의 지정학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이 연구의 몇 가지 결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일전쟁(1894-1895)의 결과,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은 심대하게 변화했다. 배재학당에서의 서구적 교육을 통해 중국은 물론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게 된 그의 지정학적 인식은 근대적 (군주)주권국가였던 대한제국의 독립이념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둘째, 비록 이승만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대한제국은 군주주권에 집착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대한제국의 군주주권과 충돌했던 이승만은 투옥되었고, 그의 국민주권론은 한성감옥에서 받아들인 개신교, 특히 만인사제(萬人司祭)론에 의해 강화되었다.
셋째,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은 중화주의와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방어적 인식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유라시아 전역으로 뻗어가던 러시아의 팽창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정교가 만인사제론에 입각한 개신교와는 달리 정교일치적 폐단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넷째, 대한제국은 군주주권에 집착했던 한계 속에서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외교주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말았다. 군주주권이 일본에 종속됨에 따라 일찍이 독립협회가 주도했던 만민공동회의 후예들인 국민주권론자들이 주권회복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멤버였던 이승만은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에 새로운 희망을 걸었고, 일찍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던 미국의 후원을 통한 한반도중립화를 통해 한국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개신교는 동시간대에 존재했던 세계의 또 다른 공간(서구적 공간)과 이승만이라는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인식적 통로로서 기능했다. 그러한 통로를 통해 형성된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은 중화제국, 러시아제국, 그리고 일본제국의 지정학적 인식에 맞서서 독립을 지향했고, 1948년 대한민국의 인식적 토대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이 개신교의 심대한 영향을 받았던 만큼, 무신론적인 지정학적 인식과의 충돌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This paper deals with the geopolitical perception of young Syngman Rhee who later became the founding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Conclusion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First, in the aftermath of the war between the Qing Empire and the Japanese Empire which was concluded by the Treaty of Simonoseki that guaranteed the independence of Korea in its first clause, young Syngman Rhee’s Sinocentric geopolitical perception underwent a profound change. This change of geopolitical perception was due largely to his learning in the Paichai college (Paichai hakdang, 1895-1898). His new geopolitical perception went along with the independence ideology of the TaeHan Cheguk (the Great Han Empire, 1897-1910). The Independence was to be gained not only from China, but also from Russia which had strengthened its hold over the court after the Agwan pacheon incident (the escape of King Gojong to the Russian Legation, 11 Feb 1896).
Second, even though Syngman Rhee supported strongly the founding of the TaeHan Cheguk, the official doctrine of her national sovereignty was limited to a monarchical sovereignty. During his imprisonment by the government of the TaeHan Cheguk for being accused as a revolutionary, Syngman Rhee’s perception of popular sovereignty was strengthened by Protestantism to which Syngman Rhee resorted during his imprisonment (1899-1904). Especially, the Protestant theory of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was influential on his notion of popular sovereignty.
Third, the geopolitical perception of Syngman Rhee, incompatible with Sinocentrism, also contained elements of Russophobia. He differed from some leaders who wanted to invite stronger Russian influence to balance out the Japanese influence and the remnants of the Qing’s influence. The source of his Russophobia was based on his foreboding about Russia’s rapid expansion over several centuries. Simultaneously, it was based on this critical stance on the Russian Orthodox Church which had, according to his Protestant belief, an entrenched, erroneous custom of the unity of church and state.
Fourth, since the international sovereignty of TaeHan Cheguk was forcefully surrendered to Japan in 1905, the new Independence movement leaders comprised of those who advocated the popular sovereignty in the Convocation of Ten Thousand People (Mannim gongdonghoe), organized by the Independence Association (Dongnip hyeophoe) in 1898. Syngman Rhee, a founding member of this association, went to the U.S. and made his diplomatic efforts to rally the U.S. sponsorship for the neutral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which might in turn recover Korea’s international sovereignty.
After the clashes with the Chinese, Russian, and Japanese imperial geopolitical perceptions, Syngman Rhee’s geopolitical perception which had been deeply influenced by Protestantism became one of the ideational foundations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948. As much as his geopolitical perception was rooted in Protestantism, it had also contained the seeds of confrontation with the atheistic geopolitical perception of the 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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