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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근대 식민지 도시 ‘대평양’ 건설과 평양 조선인들의 대응 = The construction of the "Great Pyongyang", a modern city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and the response of the Korean resi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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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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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examines the urbanization process of Pyongyang, which was pursued to build a "Great Pyongyang"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as well as the contents related to the construction of the "Great Pyongyang". The article also analyzes who the leading force behind the urban development movement was among the Koreans in Pyongyang.
After 1910, urban development in Pyongyang began in earnest. This development was centered on the new urban area, which was a residential area for Japanese people. The area where the Koreans lived was called the old town, while the area where the Japanese lived was called the new town. After 1917, Honda Tsunekichi (本田常吉), who was Pyongyang Buyun (Pyongyang Regional Minister), called for the construction of the "Great Pyongyang"-a large industrial city. The Korean residents accepted this as the "resurrection of the ancient Pyongyang". However, when urban development focused on Japanese residential areas, the Koreans in Pyongyang saw this as ethnic discrimination. They thus started the old town development movement. Those who led this initiative were key figures in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s and economic activities from the late Choseon Dynasty; some of them were members of the local council (府協議會) in the 1920s. While working, the old city devoted itself to the development movement.
In 1934, the Koreans in Pyongyang realized the need for a press agency to develop the old city and western Pyongyang (the area adjacent to the Korean one). They thus started publishing The Great Pyongyang magazine. In this case, the leading forces were those of Chang-ho Ahn and Man-sik Cho, two Christian nationalists. They were active in the Heungsadan (the Young Korean Academy) while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and in the Shuyang Friendship Community (修養同友會) after returning home. In 1937, the Japanese authorities censored The Great Pyongyang. The people involved were arrested during what became known as the Suyangdonguhoe Association incident. After this episode, there was no further discussion of the "Great Pyongyang construction movement" by the Koreans in Pyongyang.
본 논문에서는 일제의 ‘대평양’ 건설이라는 목표로 두고 추진하던 평양의 도시화 과정에 대해 고찰하고, 이어 평양 조선인들의 도시개발운동, 그리고 평양 조선인들의 단합과 정보 교환을 위해 발간한 월간지 대평양의 ‘대평양’ 건설과 관련된 내용들을 분석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평양의 도시화 과정에 대해 총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아울러 평양의 조선인들 중 도시개발운동의 주도세력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고찰하였다.
1910년 이후 평양의 지역개발이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도시 개발은 주로 일본인 거주지역인 신시가지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인 거주지역을 구시가지, 일본인 거주지역을 신시가지로 불렀다.
1917년 이후 평양 부윤 혼다는 평양을 대공업 도시로 전환하자고 외치면서 ‘대평양’ 건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평양의 조선인들은 ‘대평양’ 건설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들은 이를 고대 평양의 부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평양 건설을 주장한 이후에도 일본인 거주 지역 중심으로 도시개발이 이루어지자 평양의 조선인들은 이를 민족적인 차별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평양의 조선인들은 직접 구시가 개발운동에 나섰다. 이를 주도한 세력은 구한말부터 평양의 정치사회운동, 경제단체활동, 정치활동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었고, 이들 중 일부는 1920년대 부협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구시가 개발운동에 매진하였다.
1934년 평양의 조선인들은 조선인 거주지역과 인접지역인 서평양을 발전시키기 위해 언론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34년 대평양을 발간하였다. 주도세력은 평양의 기독교 민족주의자인 안창호와 조만식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로서 미국 유학시절에는 흥사단, 귀국 후에는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었다. 일제 당국의 검열로 1937년 3월호가 출간하지 못하면서 더 이상 발간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관련 인물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더 이상 평양 조선인들의 대평양 건설 논의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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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9-07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존재론 연구 -> 현대유럽철학연구외국어명 : Heidegger Studien -> Researches in Contemporary European Philosophy | KCI등재 |
2015-06-15 | 통합 | KCI등재 | |
2012-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5-04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하이데거 연구 -> 존재론 연구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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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3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하이데거 연구외국어명 : Heidegger Studien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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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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